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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천문을 관측하고 역서(曆書)를 발간하며 시간을 알려 주는 등의 일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관상감은 천체의 운행, 역계산(曆計算)과 시보(時報), 기상 현상의 관측과 지도 제작이라는 과학적 업무 외에 길흉과 관련된 점성(占星)과 택일(擇日), 풍수지리 등의 업무를 관장하던 조선시대 천문 관서이다.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 따르면 관상감은 “수시제정(授時齊政)은 성인지사(聖人之事)”라 인식된 전통시대 천문학을 관장한 기관으로 정3품 아문이었다. 그러나 성변(星變)을 관장하는 중요 관서였으므로 영의정이 관상감(觀象監) 영사(領事)를 겸임하여 다른 정3품 아문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가 의례와 관련하여 일월식일(日月食日)의 천제(天祭), 기우제(祈雨祭), 국가 의례일의 택일(擇日) 등의 업무를 담당했으므로 예조(禮曹)에 속했다. 관상감은 이와 같은 일 외에도 관상감관원(觀象監官員)들을 관리하고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과거 동양의 역대 왕조는 천문을 관측하여 적절한 때를 백성에게 알려 주는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유교 정치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여 천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에 관한 직제(職制)의 편성은 일찍이 삼국시대 때부터 확인된다. 삼국시대 때 천문박사(天文博士)·역박사(曆博士)가 이러한 일을 관장했고,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고려시대 때에는 태사국(太史局), 사천대(司天臺), 서운관(書雲觀)으로 성장했다.
조선은 1392년 건국하자마자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할 때, 천문의 재상(災祥)과 역일(曆日)을 택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는 관서로 서운관을 설치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서운관은 정3품 아문인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 내의원(內醫院) 등과 함께 부분적으로 변동을 겪다가, 1466년(세조 12)에 마침내 정비되었다. 이때 서운관의 명칭이 관상감으로 바뀌었다.
관상감은 역서(曆書)를 발간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 관측대를 짓고 천문 관측 기기로 천체를 관측하였다. 천문 시계나 물시계를 이용하여 국가의 표준시간을 알려 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편에 따르면 조선전기에 관상감의 청사는 상의원(尙衣院) 남쪽, 즉 경복궁에 하나가 있었고 또 다른 하나가 북부 광화방(廣化坊),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었다고 한다.
[조직 및 역할]
전통시대 천문학은 농사 절기에 대한 예보 기능 외에도 천인합일적(天人合一的)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 오행성 등 천문 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예보가 중요했다. 조선은 1392년 건국과 동시에 천문의 재상과 역일을 택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는 관서로 서운관을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정(正) 2명, 종4품 부정(副正) 2명, 종5품 승(丞) 2명, 겸승(兼丞) 2명, 종6품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2명, 종7품 장루(掌漏) 4명, 정8품 시일(視日) 4명, 종8품 사력(司曆) 4명, 정9품 감후(監候) 4명, 종9품 사신(司辰) 4명을 두었다.
서운관은 1466년(세조 12)에 관제가 재정비되면서 관상감으로 개칭되었고 조직도 약간 변하였다. 장루가 직장(直長), 시일이 봉사(奉事), 감후가 부봉사(副奉事), 사신은 참봉(參奉)>으로 개명되었으며, 사력이 없어지고 대신 판관(判官), 부봉사, 참봉 각 1명으로 개편되었다. 관상감의 직장은 누각을 관장하며 시보 업무를 담당했던 장루직의 후신이고, 참봉은 장루와 더불어 금루방에 소속된 직책인 사신의 후신이다. 봉사는 길일과 흉일을 관장하는 시일의 후신이다. 아울러 풍수학(風水學)을 지리학(地理學)으로 개칭하고 교수(敎授)와 훈도(訓導)직을 두어 각각 1명을, 음양학(陰陽學)은 명과학(命課學)으로 개칭하고 훈도직을 두어 2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천문학은 지리학과 마찬가지로 교수와 훈도직을 두어 각각 1명을 정원으로 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중앙 관청인 관상감의 지방 관청 혹은 분소 격에 해당하는, 시간을 알려 주는 일을 담당했던 장루서(掌漏署)가 함흥부와 평양부에 있었으며[『세종실록』 16년 4월 21일], 각각 종8품의 직장 1명과 종9품의 녹사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상감은 기본적으로 천거(薦擧)를 통한 음양학 과시(科試)로 관원을 선발하였고, 승진이나 직책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취재(取才)를 치렀다. 『경국대전』「예전(禮典)」편에 따르면, 음양과는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의 삼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식년시(式年試)와 대증광시(大增廣試) 전해 가을에 관상감에 이름을 등록하여 초시를 치르고, 그해 초봄에 예조에서 관상감의 제조와 함께 이름을 등록한 후 복시를 치렀다. 복시에서는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그리고 명과학 2명, 후에는 4명을 선발하였고, 이 외 부정기적으로 시행되는 별취재를 통해 결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시대 서운관은 천문 기관으로서 계승되었으나, 세종대 천체 관측소가 설치되고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보다 조직화된 기구로 발전했다. 서운관의 명칭은 계속되는 기구 개편에도 불구하고 조선초기까지 존속하다가 1466년(세조 12)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관상감은 천문학을 억압한 연산군에 의해서 1506년(중종 1)에 잠시 사력서로 격하된 적이 있으나, 곧 회복되어 조선말까지 천문을 관측하고 역서를 편찬하는 기관으로서 존속했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나일성, 『한국 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정성희, 『조선시대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 조승구, 「조선 초기 서운관의 기능과 변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 허윤섭, 「조선 후기 관상감 천문학 부문의 조직과 업무: 18세기 후반 이후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