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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관사(觀射)는 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를 관람하면서 군신(君臣) 간의 질서와 도리를 확인하고 화목함을 도모하는 행사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활쏘기를 하는 의식을 대사례(大射禮)라고 하였다. 활쏘기 의식은 본래 공자(孔子)가 군자(君子)의 소양으로 강조한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의 활쏘기 관람은 신하들이 심신(心身)의 수련으로 인해 체득한 덕(德)의 드러남을 살피는 행위였다. 조선시대의 관사는 군신 간의 친목 도모와 무비(武備)의 권장 등을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시하였다. 아울러, 유흥과 오락 및 외국 사신의 접대를 위해 시행되기도 하였다.
관사와 관련된 행사를 특별히 군례(軍禮) 의식의 하나로 만들어 정비해 놓은 것이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된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 향사의(鄕射儀)이다. 사우사단의는 왕이 직접 사단에 나아가 활을 쏘는 의례이고, 관사우사단의는 왕이 신하들이 활을 쏘는 것을 관람하는 의례이며, 향사의는 향촌 교화를 목적으로 지방관이 주재한 활쏘기 의례였다.
[절차 및 내용]
관사에는 왕자·부마를 비롯한 내·외 종친, 문·무 신료, 무재(武才)가 있는 금군(禁軍)과 군사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개 두 무리로 나눈 뒤 짝을 이루어 활쏘기를 하여 성적에 따라 상을 받거나 벌주를 받았다. 상으로는 활과 화살, 의복과 옷감, 말 등이 성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고, 정식 관사의 경우에는 1등을 한 수석에게 자급(資級) 하나를 올려 주었다. 행사에 참여한 문·무신에게는 활쏘기뿐만 아니라 평소 독서한 경서(經書)나 병서(兵書)를 시험보아 상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무신은 활쏘기를 하고, 문신은 시를 짓는 경우도 있었다[『선조실록』 17년 3월 25일]. 외국 사신을 위한 관사에는 명·일본·여진의 사신 등이 참관하였다.
관사는 주로 대궐 안의 후원(後苑)에서 행해졌는데,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서현정(序賢亭)·충순당(忠順堂)·화위당(華韡堂), 창경궁의 춘당대(春塘臺), 창덕궁의 서총대(瑞葱臺), 경희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시행된 기록이 남아 있다. 대궐 외곽의 장소로는, 광화문(光化門)·홍화문(弘化門) 밖, 장의동(壯義洞)의 신정(新亭), 월산대군저(月山大君邸)에서 시행되었다. 모화관(慕華館)과 살곶이[箭串]에서는 왕이 직접 군사를 사열하는 열무(閱武)와 함께 시행되기도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관사 후에는 대개 주연(酒宴)과 여악(女樂)이 수반되었는데, 이때 과음과 기녀 희롱 등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여 시행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관사할 때 대궐 담장 밖에서 꽹과리를 세게 쳐서 왕에게 억울한 사연을 호소한 사례도 있었다[『성종실록』 11년 12월 14일]. 이와 같은 호소 행위를 격쟁(擊錚)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