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전근대 한국 사회의 노비는 소유권의 귀속에 따라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뉜다. 이 중 왕실, 중앙 또는 지방의 각종 관서에 소속되어 사역하는 노비를 공노비(公奴婢)라 한다. 이들은 신역(身役)을 제공하거나 신공(身貢)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국가에 역(役)을 바쳤으며, 이들의 신분은 세습되어 1801년(순조 1) 공노비 혁파 시까지 그 자손이 대대로 신역을 이어받았다.
[내용 및 특징]
노비는 천민에 해당하므로 공노비를 공천(公賤)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 공노비는 다시 그 소속에 따라 각사노비(各司奴婢)와 각관노비(各官奴婢)·내수사노비(內需司奴婢)로 구분된다. 이 중 각사노비는 거주지에 따라 한양에 거주하는 경거노비(京居奴婢)와 지방에 거주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눌 수 있다. 외거노비는 다시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나뉘는데, 전자는 경중(京中)의 각사에 올라와 신역을 바치는 노비이고 후자는 신역을 대신하여 신공만 납부하는 노비이다. 각관노비는 지방 관아에 소속되는 노비를 말한다. 내수사노비는 대궐 안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차비노(差備奴) 형태로 있는 이들도 있고, 일정량의 신공만 부담하는 경우도 있다.
납공노비의 신공은 『경국대전』에 노(奴)의 경우 매년 면포 1필과 저화 20장, 비(婢)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일반 양인의 경우 정남(丁男)만 국역 의무가 있었던 것과 달리 노비 신분의 경우는 계집종도 신공을 납부해야 했다. 선상노비의 경우는 중앙과 지방 모두 정해진 기일만 차출되어 역사(役事)를 제공하는 것으로 의무가 끝났다.
따라서 선상·납공노비 모두 사노비와 달리 개인적 경제권을 가지고 가족 단위의 생활이 가능한 존재였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 이념에 입각한 신분제 사회였고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이라는 노비 소생의 신분 귀속 원리가 남아 있었다. 이에 전란이나 반란 등이 일어났을 때 특별한 공적을 세운 이가 아니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부모의 신분을 세습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役事)하는 관서나 신역의 형태도 대체로 세습되었다.
[변천]
삼국시대 공노비는 전쟁 포로나 채무자 등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고려시대 이후 정복 전쟁이 없어지자 범죄자 등 보다 안정적인 노비 확보책이 필요했다. 조선초기에는 사사(寺社)에서 몰수한 노비를 비롯하여 각종 범죄자와 그 가족을 속공(屬公)하는 방법 등을 통해 공노비를 확보해 나갔다. 또 군액 확보를 위해 북도의 사천(私賤)을 남도의 공천으로 바꿔 주는 등의 정책도 논의되고 시행된 적이 있다[『중종실록』 11년 7월 14일]. 역모와 모반에 연루된 양반가의 구성원들이 속공되어 공천 신분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등 전쟁이 없는 시기에는 나름의 공노비 확보책이 마련되었다.
그 밖에 조선시대 노비제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노비의 신분 세습법은 또 하나의 공노비 확보책으로 활용되었다. 한번 천안(賤案)에 기록되면 몸을 뺄 방도가 없고 천역이 자식에게 세습되므로 이를 모면하기 위해 도망하고 떠돌아다니는 폐단이 논의되곤 하였다. 이는 노비 신분 세습제가 노비의 확보책이면서 동시에 공노비들을 이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형택, 『조선 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89.
■ 지승종, 『조선 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95.
■ 홍승기, 「고려시대 공노비의 성격」, 『역사학보』80,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