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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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취(鼓吹)

서지사항
항목명고취(鼓吹)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전부고취(前部鼓吹), 전정고취(殿庭鼓吹), 전후고취(殿後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
동의어군악(軍樂)
관련어기취(騎吹), 노부(鹵簿), 취타(吹打)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의 행차 때 진설하는 궁중 악대.

[개설]
고취(鼓吹)는 본래 군영에서 신호로 사용하는 타악기와 관악기를 치고[鼓] 부는[吹] 연주 방법에 따라 이름 지어진 용어로, 군악(軍樂)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후대에 고취가 전정에서 연주하는 악대로 의미가 바뀌었고, 행진에서 연주하는 악대는 ‘기취(騎吹)’라고 하였다. 고취의 종류는 전정고취(殿庭鼓吹)·전후고취(殿後鼓吹)·전부고취(前部鼓吹)·후부고취(後部鼓吹)의 네 종류가 있다. 전정고취와 전후고취는 궁중에서 연주하지만 왕의 출궁 및 환궁과 관련 있고,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왕의 행차 시 노부에 진설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황의장·홍의장·소가에는 전부고취만 배치되고, 대가노부·법가노부에는 전부고취와 후부고취가 모두 설행되었다. 왕비의장은 전부고취가 설행되는데, 대가노부의 전부고취 규모의 반이다.

고취악에는 '성수무강'·'태평년'·'보허자'·'오운개서조'·'수룡음'·'낙양춘'·'환궁악'·'여민락'의 여덟 곡이 있었으나, 현재 '보허자'·'낙양춘'·'여민락'만 전승되고 있다. 전정고취·전후고취·전부고취·후부고취 등 고취의 연주자는 악사(樂師)와 악공으로 구성되고, 악사는 복두(幞頭)·녹초삼(綠綃衫)·오정대(烏鞓帶)·흑피화(黑皮靴)을 착용하고, 악공은 화화복두(畵花幞頭)·홍주삼·오정대·오피리를 착용한다.

[내용 및 특징]
고취는 전정고취·전후고취·전부고취·후부고취의 네 종류가 있는데, 모두 왕의 행차와 관련 있는 악대이다. 전정고취는 조참, 문무과전시·생원진사 방방, 배표와 배전의 권정례에서 전후악과 교대로 연주하는 악대이다. 『악학궤범』 당시 전정고취의 구성과 규모는 당비파 6·방향 2·피리 6·장구 8·당적 4·현금 2·퉁소 2·월금 2·가야금 2·향비파 2·아쟁 1·대쟁 1·대금 7·해금 2·대고 1·박 1로, 악공 50명 악사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편성은 전정헌가와 거의 같은데, 다만 전정헌가의 건고·삭고·응고·편종·편경이 없는 점만 다르다. 전정헌가가 전정고취보다 규모가 큰 악대이지만, 기능은 유사하다. 이것은 이 악대 연주자들의 관복이 전정헌가와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전후고취는 왕이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 사이를 행차할 때 연주하는 악대로, 1466년(세조 12)에 새로 등장하여 조선말까지 전승되었다[『세조실록』 12년 5월 10일]. 전후고취는 전정헌가 혹은 전정고취와 짝을 이루어 연주하였다. 1472년(성종 3) 이전에는 왕의 출입에 전정헌가만을 설행했고, 1472년 당시에는 전후고취만을 설행했다. 이는 한 악대만 사용하는 데 따른 불편함으로 인해 왕의 출궁과 환궁에 전정헌가 혹은 전정고취와 함께 설행한 것으로 보인다.

전후고취의 진설 위치는 왕이 근정전에 나아가면 사정전 문 밖, 근정문에 나아가면 근정전의 계단 아래 설치했다. 출궁 때 사악이 어가의 이동을 전하면 전후고취가 음악을 시작하고, 왕이 근정문에 들어올 때 연주하다가 전정헌가악이 교대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박을 급히 치고 전후고취 음악이 그친다. 환궁할 때는 전정헌가를 시작하면 왕이 옥좌 또는 연(輦)에서 내려와 여(輿)를 타고, 근정전 후문을 나오려 할 때 전후고취가 음악을 시작하고, 왕이 안으로 들어가면 급히 박을 치고 음악을 그친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왕의 출궁과 환궁 시 전후고취를 설행하는 의례는 정전예연·조하·조참·연향이다. 하지만 『국조오례의』에는 가례의 영조칙 등 19종류, 빈례의 인국의 서폐를 받는 의식 등 두 종류, 군례의 사우사단의 등 두 종류이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전후고취는 박 1·당비파 2·방향 1·퉁소 2·(당)피리 3·당적 2·대금 3·장구 4·대고 1 등 아홉 종류의 악기로 편성되었다. 연주자는 1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악사가 1명, 악공이 18명이다. 이러한 전후고취 편성은 숙종대에 피리와 대금 한 명, 장고 두 명으로 줄었고, 당악기인 퉁소·당적이 제외되었으며, 해금 두 명이 새로 추가되었다. 그러나 영조대에 이르면 숙종대와 비교하여 대금과 피리가 각 한 명씩 늘었고, 퉁소와 당적이 다시 편성되어 각 한 명씩 늘었으며, 교방고가 한 명 증가되었다.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노부의 구성 요소로, 성안에서의 예행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이다. 악기는 박 1·당비파 6·(당)피리 6·퉁소 6·대금 6·당적 4·장구 6·교방고 1, 방향 1로 편성된다. 이외 맨손 8, 교방고를 운반하는 담지 네 명, 방향을 운반하는 담지 두 명 등 연주자는 모두 51명이며, 연주자별로는 악사 한 명 악공 50명이다. 고취의 악기 편성은 당시 형편에 따라 조정되었고, 조선후기에는 해금이 추가되는 변화가 있었다. 성종조에는 왕이 여를 타고 궁에서 나와 연을 탈 때 고취를 시작하고, 왕이 연에서 내려 입차할 때 박을 급히 치고 음악을 그쳤다.

[변천]
우리나라의 고취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보인다. 백제 때인 238년(백제 고이왕 5)에 천지의 제사에 고취를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취 악기인 고(鼓)·각(角)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사망하였을 때 왕이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효소왕 당시 병고(兵庫)의 고·각이 스스로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각종 고분벽화에 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백제·신라와 마찬가지로 각을 포함한 고취 악기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고취는 고·각으로 편성된 군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고취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고취악은 군영 악대가 아닌, 대악서나 관현방에서 연주된 음악이다. 고취의 악기 편성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고, 고취악을 개가(凱歌)와 고악(鼓樂)이라고도 했다. 개가는 군례인 사환의(師還儀)에서 고취령(鼓吹令)이 연주한 고취악이고, 고악은 빈례와 가례에서 연주한 음악이다. 고려시대에는 원구·선농·태묘의 제례와 연등회·팔관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출궁할 때 등에 고취악을 연주했다.

조선시대에는 고취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1445년(세종 27)에 전정고취가 형성되었다. 다만 이때 전정고취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고취를 전정에 진설한다고 하였다. 이 고취는 조례(朝禮)에 진설하는 것인데, 헌가 악기 편성도도 제시되어 있어 의례의 규모에 따라 헌가와 고취를 구분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서례』 가례에는 전정헌가와 고취는 제시되어 있으나, 전정고취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배반도를 통해서도 전정헌가와 고취의 쓰임을 구분할 수 있다. 『악학궤범』에는 전정고취·전후고취·전부고취·후부고취가 기록되어 있다. 영조대에는 악공고취(樂工鼓吹)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

<표 32> 조선시대 고취의 악기편성 일람표

[의의]
고취는 군영 음악이자 궁중 행악의 하나로서 주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행악은 성격에 따라 고취와 취타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음악적 성격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전의 고취는 현재 취타악으로 전승되고, 고려시대 이후 고취는 궁중음악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취는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군영 음악과 행악의 전통을 전승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 태학사, 2007.
■ 이숙희, 「조선조 행악 연주악대의 종류와 성격」, 『한국음악연구』, 한국국악학회, 2002.

■ [집필자] 이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