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고만의 고(考)는 근무 태도나 근무 실적 등을 일정 기간 단위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관료들은 보통 1년에 2번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1고는 대략 6개월의 행정에 대한 평가였다. 관료들은 일반적으로 한 자리에서 3년을 임기로 하였으므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행해진 5번의 평가 성적을 기준으로 승진 여부를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고만이라는 개념은 5번의 평가를 다 채운 것, 즉 관료의 일정 임기를 마친 것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3년의 임기는 실제적으로 근무하는 기간을 30개월로 보고 월 단위로 계산하는 인사 방식인 개월법(箇月法)도 같이 사용하였는데, 이때에는 일정 임기가 다 된 경우 고만이 아니라 개만(箇滿)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고만과 개만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고만에 대한 첫 용례는 1392년(태조 1) 수령의 전최법(殿最法)을 논하면서 언급된 것이었다. 당시 대소의 목민관은 모두 3년을 임기로 하였으며 임기 동안의 행적을 평가하는 고과 규정이 마련되었다. 수령으로서 3년의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탁용하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마련하면서, 임기를 마치는 것을 고만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1416년(태종 16)의 기록에 의하면 관직의 임기에 개월법을 적용하여서 수령은 30개월을 임기로 하여 고만 대신에 개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세종대에는 경외 문반, 무반, 참외관에 대한 고과제가 차례로 정비되면서 인사행정이 합리적으로 운용되었다. 1423년(세종 5)에는 외방 수령들을 해마다 2번씩 성적을 고사하되, 5번째 고사 중 3상(三上)부터 5상(五上)까지는 가자(加資)하여 주었다. 3중(三中)부터 5중(五中)까지는 이전에 받은 품질을 그대로 두고, 1하(一下)라도 있으면 모두 파면시켰다. 또 5번의 고사까지 끝나기를 기다려서 가자하고, 임명한 지 60개월이 차기를 기다려서 경관(京官)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경관도 5번의 고사를 채우게 하고, 3상부터 5상까지는 가자하여 주며, 3중부터 5중까지는 이전의 자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만일 1하가 있을 경우에는 또한 모두 파면시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5일]. 1425년에는 무반도 문반의 예에 따라 고과를 실시하되 5고3상 이상이면 가자하고, 3중은 자급을 그대로 두고 4중 이하는 파면시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7월 13일]. 1444년에는 경외의 문무 참외관의 고과제를 정하여 참상관 이상과는 달리 3고2상 이상이면 가자하고, 1하에 중이 2번 연속되면 파면하고 중이 사이사이 2번인 등은 자급을 그대로 두게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1월 6일].
또 일반 관료는 물론 서리의 경우에도 고만제가 운영되었는데, 1403년(태종 3)에 제정된 이전(吏典)의 고만거관법(考滿去官法)이 이를 잘 보여 주었다.
[변천]
고만제가 만들어졌으나, 일정 임기를 채우고 다음 자리로 이동하는 고만 규정은 때로 지켜지지 않았다. 우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경우 고만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440년(세종 22) 황희는 대간으로서 외직에 보임된 자라도, 만약 어질고 재능이 있으면 육기(六期)의 임기에 얽매이지 말고 발탁하여 청요(淸要)한 경관에 임명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수령이라는 직무가 중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2년 7월 18일]. 이처럼 능력 있는 관원은 임기 이전에 발탁하여 고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수령의 경우에 임기가 다 찼어도 농번기에는 고만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1431년(세종 13)의 기록에 의하면 각 도의 감사 및 절제사·처치사·수령관 등은 농번기에 고만이어서 바뀌게 되면 전송하고 맞이하는 데 폐해가 있으니 이후로는 각 고을 수령의 예에 의하여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려서 체차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3년 6월 12일]. 이는 농번기에 수령이 이직하는 경우 민가에 피해 줄 것을 고려하여 고만제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특히 세종대부터는 수령은 60개월 고만제에 대한 폐단도 제시되었다. 수령은 경관과는 달리 그 임기가 6년으로 길었는데, 이를 문제 삼는 지적들이 있었다[『세종실록』 13년 4월 6일]. 수령의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는 안이 제안되었으나, 세종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의는 세조대에도 거론되었다. 1466년(세조 12) 영의정 한명회는 수령의 자리가 빈 경우가 많은데, 만약 고만하는 법에 구애된다면 채워서 임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이 법에 얽매이지 않기를 청하면서 고만제의 수정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에 따라서 수령의 고만제는 어느 정도 변동이 있었다[『세조실록』 12년 11월 5일]. 그러나 『경국대전』에서 수령의 임기가 6년으로 명시되면서 수령의 고만제는 다시 6년으로 환원되었다. 이후로도 수령의 6년 고만제는 경관에 비하여 길었기 때문에 계속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중종실록』 5년 6월 11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만이라는 용어가 1524년(중종 19)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개월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개만(箇滿)이라는 용어로 이를 대체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