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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회도(契會圖)

서지사항
항목명계회도(契會圖)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기록화(記錄畵)
하위어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동의어기로회도(耆老會圖), 기영회도(耆英會圖)
관련어계회(契會), 금오계첩(金吾契帖), 기로회(耆老會), 기영회(耆英會), 신해생갑회지도(辛亥生甲會之圖),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郞官契會圖)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의 회합 문화인 계회(契會)를 기념하여 제작한 그림.

[개설]
조선시대 관료들은 계회를 통해 상호 간의 사교와 친목을 도모하고,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기념물로 그림을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는데, 이것이 계회도(契會圖)이다. 계회도는 모임의 장면 등을 그린 그림에 참석자의 이름과 모임의 취지 등을 기록한 글로 구성되었다. 이런 특징은 오늘날의 기념사진과 유사한 면이 있다. 사진기가 없던 과거에는 이처럼 그림으로 사진의 기능을 대신했다. 어떤 장면이나 상황을 기록하여 전달할 때는 문자보다 그림이 더 효과적이다. 계회도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하여 ‘계회의 사실(事實)을 기록하고 구성원들이 기념물로 나누어 갖기 위하여 제작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계회는 관료 사회에서 인화와 결속을 통한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기능을 하였다. 계회를 통한 만남을 기념하고 이를 그림과 글로 기록하여 간직하려는 풍조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생겨난 기록물에 대한 관심이 계회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계회는 모임 구성원들 간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공유되는 관계나 정서적 동질감, 소속과 출신 등 동류(同類)로서의 조건을 갖출 때 성립될 수 있다. 오늘날의 단순한 친목이나, 돈을 내어 이자를 늘리는 식리(殖利)를 목적으로 한 계(契)와는 근본적인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계회도는 고려시대 계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16~17세기의 유행기를 거쳐, 18~19세기의 퇴조와 변용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양반 관료층의 계회는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다루는 사교계나 교유계(交遊契) 등 일반 계의 성격과도 합치되는 면이 많지만, 이와 변별되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 계회가 성립될 수 있는 요건은 우선 구성원들 간의 동류로서의 관계를 전제로 하였다. 계회는 무엇보다 연대 의식을 토대로 하며, 관례화된 정기적인 회합이나 일시적인 모임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계회도 제작을 관행으로 하였다.

계회도가 계회의 산물이라는 점이 말해주듯이 계회의 유형은 계회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계회의 유형으로는 같은 관청의 동료들로 결성된 동관계회(同官契會), 국가적인 역사(役事)에 참여한 관원들의 도감계회(都監契會), 과거 시험 합격 동기생들의 동방계회(同榜契會), 나이가 같은 관료들의 동경계회(同庚契會), 원로 관료들의 기로회(耆老會)·기영회(耆英會), 사적인 만남을 기념한 계회(契會)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포상과 사연(賜宴)을 받은 공신(功臣)과 근신(近臣)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계회도를 제작한 주체는 대개 고령의 퇴직 관료나, 관청에 소속된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지방의 양반이나 중인층에 이르기까지 계회도 제작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져 두터운 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계회도는 계회의 장면이 중심이 되지만, 배경에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상경(理想景)의 산수(山水)와 실경(實景)의 경관을 그린 그림, 전각(殿閣)과 계회의 장면을 표현한 도상, 고사(故事)를 비롯한 감상화(鑑賞畵)에 속하는 그림 등 매우 다채롭다. 즉, 계회의 장면을 그린 것뿐 아니라 이와 무관한 감상의 소재를 그린 경우도 계회도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계회도가 다양한 주제의 모티프를 담고 있는 것은 계회도가 기록화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감상화로서의 성격도 겸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계회도를 그리게 하여 소유한 자들이 양반 관료층이었다면, 계회도의 제작은 주로 화원(畵院) 화가, 전문 화사(畵師)로 추정되는 직업 화가들이 담당하였다. 계회도에는 직업 화가들의 뛰어난 기량이 잘 드러나 있으면서도, 화가 개인의 역량에 따른 화격의 차이도 함께 나타났다. 따라서 단조로운 형식의 그림도 있지만, 다채롭고 흥미로운 도상과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림도 있다. 오랫동안 소유자의 집안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왔던 계회도는 전란과 재난을 겪으면서 망실되거나 손상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자료들이 소개되어 우리나라 고유의 기록화, 기념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조명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계회도의 연원은 기로회도·기영회도 계열과 문인 계회도의 두 계열로 파악된다. 기로회도·기영회도는 당·송대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와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 등에 전고(典故)를 둔 고려시대 최당(崔讜)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그려진 해동기로회도는 후대에 기영회도의 시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 참여한 계회의 시원도 고려시대에서 비롯되었다. 계회도의 초기 형식은 관청에서 관원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만든 제명록(題名錄)에 발문(跋文) 형식의 글이 장황(粧潢)된 단순한 축(軸)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그림이 함께 연결되어 계회도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가장 활발히 그려진 계회도는 같은 관청 소속 관료들의 동관계회도이다. 특히 15~16세기에 동관계회가 크게 유행하였고, 이는 다른 유형의 계회도가 함께 성행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동관계회도가 유행을 이룬 또 하나의 요인은 조선시대 관료 사회의 독특한 관행인 신참례(新參禮)의 성행이었다. 신임관원들이 행한 일종의 신고식 관행인 신참례는 관료 사회에 계회의 관행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조선초기부터 신참례 때에는 신임 관원들이 계회도를 준비하여 선배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는 계회도를 양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류의 단위에 속하는 동방계회, 동경계회, 도감계회는 16~17세기를 거치며 활성화되었다. 동경계회는 나이만 같으면 맺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방의 향반이나 중인층으로 확산되었다. 반면 과거 시험의 합격 동기생들의 동방계회는 소수의 인원들이 참여한 형태였다. 역사(役事)에 참여한 관원들의 도감계회는 일회적인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록물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이러한 여러 계회의 성격은 계회도에도 적용되었다. 동경계회도와 동방계회도가 건물과 산수를 배경으로 한 연회 장면에 초점을 두었다면, 도감계회도는 그들의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기영회도는 정기적이며 공식적인 연회였던 만큼 그림의 전형이 마련되었지만, 사적인 기로연은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그려졌다. 또한 사연 등의 행사를 기념한 계회도는, 참석자들 사이에 동류로서의 관계가 성립되어, 영광을 함께 나눈 성대한 연회 장면이 그려졌다.

계회도에 나타난 그림의 특징은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형식, 둘째는 관아(官衙)의 청사를 그린 형식, 셋째는 건물 내에서의 계회 장면을 그린 형식, 넷째는 행사도나 감상화를 주제로 한 형식 등이다. 조선시대 전반기 계회도의 화풍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배경 산수의 표현이다. 배경 산수는 16~17세기의 관념 산수와 실경 산수의 경향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실경 산수화 계열의 계회도는 16~17세기의 관념 산수가 풍미하던 시기에 실경을 그린 계기를 마련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관아의 청사를 그린 계회도의 유형은 건축물에 적용된 것이다. 청사는 관료 자신이 몸담았던 관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러한 유형은 동관계회도에서만 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청사나 건물의 전경을 강조한 형식과 실내 혹은 야외에서 장면을 강조한 형식으로 나뉜다.

계회의 장면을 강조한 형식은 16세기 중엽부터 나타난다. 배경 산수 중심에서 계회의 장면을 중심으로 그리는 변화가 이때부터 나타났다. 17세기에는 전형이 적용되더라도 배경을 생략한 채 인물 묘사가 구체화되고, 이목구비 묘사에 점진적으로 사실성이 강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18세기 이후의 계회 장면을 그린 도상에는 전형의 적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야외에서의 계회 장면도 산수와 인물이 충실히 표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유행한 풍속화와도 경계가 없을 만큼 계회도는 일반화되어 갔다.

감상화 형식은 계회나 행사와 무관한 화조, 고사, 이상 산수를 소재로 하여 17세기부터 부분적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수요자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감상화는 전형의 형식화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면도 있으나, 계회도의 영역을 넓히고 기념화에 감상화의 기능을 강조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계회도는 늘 가까이에서 계회의 취지를 생각하며 감상하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17세기의 계병(契屛)은 주로 관청과 도감의 관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전의 축과 첩(帖) 형식의 계회도보다 다양한 소재와 다채로운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17세기의 계병에는 관아의 청사, 업무 장면, 산수가 주된 주제였으나, 18~19세기로 가면 궁중 행사도와 고사도의 등장과 더불어 두 형식이 병존하며 그려졌다.

이와 같이 산수 경관과 계회 장면, 그리고 전각을 배경으로 한 도상은 조선초기에는 축 형식, 중기 이후에는 첩과 병풍(屛風)이 주된 장황 형식이 되었다. 특히 17세기에는 축·첩·병풍 형식이 병존하였으며, 장황 형식의 변화가 그림의 내용에도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계병은 산수화와 고사도, 그리고 궁중의 행사도를 담은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변천]
계회도는 조선시대 전반기인 1392년부터 약 1700년까지는 활발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가, 후반기인 약 1700년부터 1850년대까지는 변모와 퇴조의 경향을 보였다. 즉, 1700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의 양상이 파악된다. 15세기의 계회도에는 고려시대의 기로회 계열의 그림이 전승되었고, 문인 계회도도 정착 단계에 있었다. 16세기는 낭관급 관원들의 역할로 동관계회의 수적 우세 속에서 다양한 동류의 유형이 생겨났고, 한편으로 신참례의 관행이 계회도 제작에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7세기에는 동관계회도의 작례(作例)가 저조하였지만, 동방계회도·동경계회도·도감계회도는 활발히 제작되었고, 공·사적인 행사를 기념한 계회도와 감상화가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되었다. 18~19세기 이후에는 기존의 전형과 형식이 퇴조하고 풍속화와 남종화풍(南宗畵風)이 유입되어 많은 변화를 보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략 15세기는 계회도의 정착기, 16세기는 유행기, 17세기는 다양화의 시기, 18~19세기는 퇴조와 변용의 시기로 파악해볼 수 있다.

조선 전반기의 계회도가 익명의 화가들에 의해 기록과 형식에 충실을 기하던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화가들의 개성 있는 화풍을 볼 수 있고, 감상화로서의 성격도 강조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중인 및 사대부 화가들이 참여함으로써, 계회도의 화풍은 개인의 양식이 중심이 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18세기 이후 계회의 취지와 결계에 따른 결속력이 매우 이완되었고, 계회도가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풍속화와 변별되는 독자성을 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8세기 이후 계회와 계회도는 관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조선후기 관료들의 사교와 교유의 중심은 동류라는 계회의 유형이 아니라, 정파·학통·가문·취향 등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의의]
조선시대에 계회도를 제작하여 남긴 계회는 일반 계의 유형으로 볼 때 사교계나 교유계로 구분된다. 그러나 계회는 소속과 신분 혹은 정서적인 동질감을 전제로 한 결속이 강조되었다. 강한 소속감과 동류의식을 토대로 한 계회는 관료 사회의 인적 결속에 많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계회가 양반 관료층의 회합의 관행으로 정착됨에 따라 만남을 기념하는 기록물을 필요로 하였고, 여기에 대한 수요가 계회도의 제작과 유행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

계회도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 가치관이 배경이 되어 관료 사회의 관행과 관료들의 참여, 그리고 화가들의 공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양반 관료층의 기록화 혹은 기념화라는 한 지점을 이루고 있다. 직업 화가들의 기량과 작품 세계를 담고 있는 계회도는 기록화라는 점에서 화가의 개성적인 표현을 제약하기도 했다. 반면에 화원 화가들의 역량에 따른 다양한 개인차, 혹은 화풍의 차이가 나타나, 다채롭게 전개되는 내용과 다양한 회화적 요소를 살필 수 있다.

또한 계회도는 계회 참석자들이 각자 한 점씩 나누어 갖는 관행으로 인해 대량으로 제작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일정한 전형을 갖추게 되었다. 즉 동일한 내용의 그림을 여러 점 그리기 위해서는 도상의 표준화를 필요로 하였다. 일정한 구도와 형식 등은 하나의 약속된 원칙처럼 적용되었다. 이러한 전형은 조선시대 전반기에 주로 통용되었지만, 계회도의 도상이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 조선 전반기에 계회도가 상당히 폭넓게 그려지고 선호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계회도가 반드시 전형을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형에 대한 반감에서 그려진 그림들이 더 참신한 화풍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계회도에 함께 장황된 서·발문과 시문은 그림의 제작 동기를 알려주는 자료이며, 제작 시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러한 기록적 요소는 계회도가 그려진 시기를 알려주며, 이를 근거로 회화 양식의 연구에 큰 이점을 제공해준다. 오늘날에도 활용할 수 있는 첨단 영상 매체들이 넘쳐나지만, 계회도는 그것이 가질 수 없는 아취와 풍류, 그리고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의식과 정서가 담겨있다.

[참고문헌]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윤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