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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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달(啓達)

서지사항
항목명계달(啓達)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계(啓)
관련어계달개차(啓達改差), 계문(啓聞), 계복(啓覆), 계주(啓奏), 계품(啓稟), 대계(臺啓), 밀계(密啓), 서계(書啓), 전계(傳啓), 직계(直啓), 초계(抄啓), 합계(合啓), 회계(回啓)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신하가 정무에 관하여 왕에게 계(啓)하여 아뢰는 일.

[개설]
계달(啓達)에는 말로 하는 경우와 문서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평시에는 주로 문서로 하고 조계(朝啓)에서는 말로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계달 방식은 2품아문에서는 왕에게 직접 계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의 아문에서는 모두 소속된 아문을 통하여 문서로 제출해야 하였으며, 지방 수령들 또한 직접 계달하지 못하고 관찰사를 통해서 전보(轉報)하였다. 계를 하는 관원, 관부, 사무의 종류에 따라 명칭도 달라져서 2품아문이나 중외제장(中外諸將), 승정원, 장례원, 사간원, 종부시 등에서 직접 아뢰는 것을 직계(直啓)라 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아뢰는 것을 대계(臺啓), 양사(兩司) 또는 삼사(三司)가 합동으로 계하는 것을 합계(合啓), 봉명관이나 암행어사가 문서로 보고하는 것을 서계(書啓)라 하였다. 그 밖에도 밀계(密啓), 회계(回啓), 초계(抄啓), 전계(傳啓), 계복(啓覆) 등이 있다.

계할 때 사용하는 문서는 중요한 일에는 계본(啓本)을 쓰고 작은 일에는 계목(啓目)을 썼다. 계본과 계목은 1412년(태종 12) 왕에게 올리는 문서 형식을 민간과 구별하여 정비하는 과정에서 계본은 장신(狀伸), 계목은 소식(消息)을 대신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태종실록』 12년 12월 18일]. 이후 1417년(태종 17)에는 입초(入抄)와 일반 사무 외에는 계본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며[『태종실록』 17년 윤5월 22일], 1422년(세종 4)에는 계달 문서에 전대(前代) 성현(聖賢)의 이름자를 쓰지 못하게 금지하였다[『세종실록』 4년 11월 16일]. 또한 1489년(성종 20)에는 일반 백성이 함부로 계본을 올리는 폐단을 시정하여 반드시 관원이 검토한 뒤 왕에게 상달하도록 하였다. 계본에 대한 회답의 기한은 10일로 정하였으며, 1835년(헌종 1)에는 계본의 종이 크기를 규격화하였다.

계본 서식은 『경국대전』, 『전율통보』, 『백헌총요』, 『추관지』 등에 조금씩 다르게 실려있으나 기본은 『경국대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줄에 계본을 올리는 관서명과 성명을 적고, 줄을 바꾸어 “삼가 아무 일로 계합니다[謹啓爲某事].”로 시작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말미에 “삼가 갖추어 계문하고 엎드려 교지를 기다립니다. 근계[謹具啓聞伏候敎旨 謹啓].”로 마무리하고 줄을 바꾸어 계본을 올린 날짜와 관원을 적고[年印月日某職臣某某職臣某], 올린 관서의 도장을 찍었다. 왕이 윤허를 내리면 이를 나타내는 ‘啓(계)’ 자가 새겨진 도장을 찍고 윤허한 날짜를 쓰고 계하(啓下)한 관서를 기록하였다.

계목 서식은 첫줄에 계목을 올리는 관서명을 적고[某衙門], 다음 줄 첫머리에는 계목으로 시작하여 “무엇이 어떠합니까[啓目云云何如]?”를 적고, 다음 줄에 계목을 올린 날짜와 관원을 적고[年印月日某職臣某某職臣某], 올린 관서의 도장을 찍었다. 왕이 윤허를 내리면 계자인(啓字印)을 찍고 날짜와 담당 승지의 성을 적고 수결하였다.

[변천]
고려 제도에서는 모든 아뢰는 일에 ‘신(申)’ 자를 썼으며, 왕에게 아뢸 때에도 ‘신’ 자를 사용하였다. 1433년(세종 15) 9월 이조에서 ‘신’ 자는 신하들끼리 서로 높이는 말임을 지적하여 왕에게 아뢸 때는 ‘신’ 자 대신 ‘계’ 자를 사용하도록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전 사용하던 ‘선신(善申)’을 ‘선계(善啓)’로, ‘신정(申呈)’을 ‘상언(上言)’으로, ‘근신(謹申)’을 ‘근계(謹啓)’로, ‘신문(申聞)’을 ‘계문(啓聞)’으로 고치고, ‘지신사’를 ‘도승지’로 일컫도록 변경하였다.

왕에게 아뢸 때 사용하는 문서는 이보다 앞선 1412년(태종 12)에 민간의 문서 형식과 구별하여 장신 대신 계본, 소식 대신 계목으로 개칭하여 사용하였다. 태종, 세종대에 정비된 ‘계’ 자 명칭과 운영 원칙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지속되었다.

[의의]
계달은 조선시대 왕에게 아뢸 때 쓰는 표현으로 신하들 사이에 또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용어와는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이전 시기와 달리 왕과 관련된 용어를 민간과 구분하여 격상한 것은 유교적 예법에 기초한 왕권 예우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추관지(秋官志)』
■ 『백헌총요(百憲摠要)』

■ [집필자] 김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