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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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敬陵)

서지사항
항목명경릉(敬陵)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능원(陵園)
동의어의묘(懿墓), 의경묘(懿敬墓)
관련어의경묘(懿敬廟), 인수대비(仁粹大妃)
분야왕실
유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추존왕인 덕종과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의경세자(懿敬世子)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는데, 1470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만들어진 무덤은 세자의 지위에 따라 의묘(懿墓)로 조성되었으나, 1470년 왕으로 추존되면서 무덤도 경릉(敬陵)으로 개칭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소혜왕후가 승하하자 경릉 경내에 능을 들이기는 했지만 합장하지는 않았다. 창릉(昌陵), 명릉(明陵) 등과 더불어 서오릉(西五陵)의 경역(境域)을 이루고 있다.

[조성 경위]
1457년 의경세자가 병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도성 근처를 샅샅이 뒤져 길지를 찾도록 명했다. 양주 대방동, 광주(廣州), 과천, 헌릉(獻陵)과 건원릉(健元陵), 과천의 청계산, 인덕원, 고양, 장단(長湍)의 옛 읍 터와 임진(臨津)의 서국동(瑞國洞), 이천, 천녕(川寧) 등이 물망에 올랐는데, 풍수지리에 따라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한 끝에 도성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지리에도 적합한 고양현(高陽縣) 봉현(蜂峴)으로 결정하였다. 봉현은 오늘날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 일대에 해당한다. 이곳에 의묘(懿墓)를 조성했으며, 신주는 의경묘(懿敬廟)에 모셨다.

이곳에 소혜왕후의 능이 조성된 것은 1504년(연산군 10)의 일이다. 그해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慶春殿)에서 소혜왕후가 승하하자, 인양전(仁陽殿)에 빈소(殯所)를 차렸다. 산릉의 터는 공조(工曹) 참판(參判) 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살피도록 하였으나, 소혜왕후의 평소 뜻에 따라 경릉에서 130보(步) 가량 떨어진 서쪽 언덕에 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무덤을 만들었다[『연산군일기』 10년 4월 29일].

[조성 상황]
덕종의 무덤은 석실분이다. 석실분 위에 봉분을 쌓고 그 주위에 양석 1쌍을 두었으며, 둘레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 앞 계체석(階砌石) 위에는 혼유석을 놓았고, 아래에는 문인석과 마석을 좌우에 각각 1쌍씩 배설했다.

조선초기 왕릉은 고려의 전통에 따라 현궁을 석실로 조성했지만, 자신의 무덤부터는 회격(灰隔)으로 조성하라는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예종실록』 즉위년 9월 22일] 소혜왕후의 현궁은 회격분으로 만들어졌다. 소혜왕후 능상(陵上) 봉분은 그 바깥쪽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뒤쪽에는 곡장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았으며, 봉분 상계(上階)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중계(中階)에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하나만 두었는데, 정전(正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이다.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도 1칸짜리 하나뿐인데, 영조 연간에 건립되었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경릉은 소혜왕후의 무덤이 서쪽에, 덕종의 무덤이 동쪽에 배치되어 있다. 망자(亡者)의 경우 서쪽을 상위로 하여 왕의 무덤을 서쪽에 두고 왕비의 무덤을 동쪽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릉은 그 반대로 되어 있다.

[변천]
1478년(성종 9)에 한명회(韓明澮)가 덕종 능실의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돌난간과 담장을 설치할 것을 청했으나, 성종은 묘소 조성 당시에 특별한 뜻이 있어 설치하지 않은 것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9년 10월 3일]. 그때 결정된 상설(象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경릉의 표석은 조선전기의 능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1754년(영조 30) 영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영조실록』 30년 12월 12일]. 그런데 이때 표석에 소혜왕후의 출생을 잘못 기록하는 일이 생겼다. 태어난 해는 적지 않고 월과 일만 썼는데, 그것도 9월 8일을 3월 12일로 오기한 것이다. 1793년(정조 17)에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이를 정조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표석을 새로 만들지는 않고, 다만 표석의 뒷부분에 주석을 달아 새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899년(광무 3)에는 재실(齋室)이 무너진 지 오래되어 재관들이 거처할 곳이 없다는 보고가 있어 이를 수리하였다.

[관련 사항]
경릉은 서오릉의 하나로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