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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다른 관서에 근무하면서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한 관원. 즉 영의정 이하 경외 대소 아문에 속하여 소속 관청의 시행사를 정리하여 춘추관에 보고하였던 춘추관의 겸직 인사.
[개설]
조선시대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다른 관청의 인사로 겸임하게 하였다. 즉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예문관의 봉교 이하, 의정부의 사인·검상, 승정원의 승지·주서 등에게 당연직으로 사관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는데, 통상 이들을 겸임사관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세자시강원·사헌부·사간원·승문원·종부시·육조 등의 당하관 가운데서 1, 2인이 사관직을 겸임하였는데 이들 역시 겸춘추(兼春秋)라고 하였다.
한편 중앙 관료 중심의 겸임사관 편성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지방의 실정이 소홀하게 취급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1515년(중종 10) 8도의 도사 및 경기·충청·경상·전라·평안 5도의 문관 수령 중에서 적임자를 춘추관 기사관으로 겸임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0년 3월 27일].
그러나 역사 편찬은 여전히 서울 위주로 이루어졌고 지방관의 사관 겸임도 유명무실하게 된 것을 1779년(정조 3)에 재정비하였고, 1788년에는 강원·황해·함경 3도에 추가로 문관 수령 각 1인을 겸춘추로 임명하였다. 대체로 이들의 임무는 지방의 선악·상벌·재난 등을 기록하고, 풍속과 민요 등을 수집·정리하여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필요한 사료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담당 직무]
춘추관은 태조조 예문관과 통합된 예문춘추관제로 운영되다가, 태종 즉위 후에 분리되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 시 직제가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겸춘추를 설치·운영한 것은 무엇보다 시사를 광범하게 기록하겠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즉 역사 사실의 광범한 기록을 위하여 전임 사관 및 겸임 사관 즉, 겸춘추를 폭 넓게 편성하여 운영해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춘추관의 기능은 시정의 기록이었고, 영사·감사·지사·동지사·수찬관·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으로 편성·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영사와 감사는 의정부의 삼정승이, 지사는 정2품의 관료가, 동지사는 종2품의 관료 2명이, 그리고 수찬관 7명은 승정원의 승지 6명과 홍문관의 부제학 등 7명이 겸하도록 하여 당상관은 모두 14명이었다.
영관사를 비롯하여 춘추관의 당상관에 편성된 겸직자들은 실록청이 개국되었을 때와 같은 특별한 국책 사업의 진행 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도 기록과 자료의 정리 같은 실무보다는 편찬을 감독하는 임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의정이 총재관 자격으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총괄하였던 사례나, 후대 사론을 총재관을 비롯한 당상관들이 작성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경국대전』에 춘추관의 당상관은 정확한 인원과 구체적인 활동이 명시되어 있는 것에 비해, 편수관 이하 기사관까지의 당하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즉 의정부의 사인과 검상, 예문관의 봉교 이하 8명, 시강원의 당하관 2명, 사헌부의 집의 이하, 사간원·승문원·종부시·육조의 당하관 각 1명 등에게 겸임시킨다고 하였을 뿐, 실제 인원과 기능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겸관 수는 38명이지만, 실제로 춘추관에 편성되어 운영된 겸춘추는 60명으로 파악된다. 이중 예문관의 정7품 봉교 2명,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 등 8명은 전임 사관이기 때문에, 순수한 겸춘추는 52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인원 역시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겸춘추의 운영이 규정과는 달리 융통성 있게 운영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사부터 수찬관까지 춘추관의 당상관을 삼정승 등 19명의 고위직 인사들이 겸임하였다는 사실은 춘추관 역시 정치권력의 동향과 민감했었음을 의미한다. 춘추관의 당상관들이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같은 국책 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편찬 과정에서 객관성이 흐려지는 경우가 발생했던 사례 즉, ‘수정실록’과 ‘개수실록’의 편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편수관 이하 기사관까지 실무를 담당했던 당하관들은 소속 관청에서 시행한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고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것은 『시정기』로 정리되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자료로 활용되었다.
내외 관원으로 춘추직을 겸임한 인사들은 소속 관청 혹은 지방에서의 시행사를 춘추관에 보고해야 했고, 춘추관 즉 실록청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 즉 이들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행사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고하는 광의의 사초 작성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기록물은 인사에 반영할 정도로 중시되었음은 기록을 중시한 당대의 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변천]
겸춘추로 활동한 실례는 겸춘추의 활동과 관련하여 실질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느 부서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경국대전』 춘추관조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규정과 운영상의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이 용이한 편은 아니다.
인조대 겸춘추들이 작성한 ‘겸춘추일기’는 1629년(인조 7)부터 1636년(인조 14)까지 84개월분으로, 홍문관의 겸춘추들이 작성한 38건을 비롯하여, 작성자를 확인할 수 없는 60여 건까지 모두 217건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춘추관 겸직의 당하관 관청 중 승정원을 제외한 모든 기관의 인사들이 작성하였는데, 이는 『경국대전』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인조대 겸춘추일기는 『인조실록』 편찬 시 이용되었다. 특히 겸춘추일기를 작성한 사람 중 대부분이 『광해군일기』의 중초본과 정초본의 등록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인조실록』의 편찬에는 6명이 참여하였다. 전체 217건의 일기 작성자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대부분이 등록관으로 참여하였고, 일부는 편찬관으로 관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즉 겸춘추들은 『조선왕조실록』 편찬 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들이 작성한 일기가 『조선왕조실록』 편찬 시 이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사초와 동일하게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겸춘추들은 소속 관청의 시행사를 일기로 작성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는 ‘장기시정(掌記時政)’이라는 춘추관 본래의 임무를 지켰던 것으로 사실의 기록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던 당시 사조와 연관된다.
전임 사관의 천거와 임명 절차는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였다. 재·학·식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 반드시 문과에 급제해야 했고, 음서나 남행의 경우는 불가능하였다. 내외사조를 살펴 가문에 하자가 없어야 했다. 나아가 전임자가 후임자를 잘못 천거한 경우에는 동일하게 벌을 받을 정도로 엄격한 조건과 절차 등이 요구되었다. 전임 사관의 선발 시 요구되었던 이상의 조건이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겸춘추들에게도 비슷한 자격 조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먼저 문신이어야 했고, 음관은 불가능하였다. 재가한 여자의 자손도 춘추직의 겸임이 불가능하였다. 인물이 용렬하거나, 물의가 있는 경우, 경솔한 경우 등 개인적인 문제와 함께 가문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겸춘추로서의 자격 요건에 부합되지 못해 임명 철회 요구 상소가 빈번할 정도였다. 더욱이 재행이 있고 신칙한 자를 골라서 서용하라고 하였던 이조의 계가 있었던 것을 보면, 겸춘추의 자격 조건이 전임 사관의 요건만큼이나 까다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겸춘추도 매우 엄격한 요구 조건과 임명 절차가 요구되었으며, 군주까지 비상한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이는 지배 관료층들의 당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철저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공식적인 정치·행정사는 당연히 기록되어야 하며, 기록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져 권계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공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임기는 현실적인 사정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었다. 통상 관직에 제수되어 순조롭게 타 관서로 전직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파직 또는 사직의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확한 임기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춘추관을 비롯하여 광범하게 운용된 중앙 관서 겸직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겸춘추의 임기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겸춘추의 임기는 인사 시기에 따라 가변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전기 승지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대략 27개월, 도승지는 41개월 정도였고, 대간의 교체는 매우 잦아 재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승지는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료들 역시 춘추관의 당하관직을 겸하였으므로 겸춘추들도 이와 비슷한 기간의 임기를 채운 것으로 본다.
[의의]
춘추관은 시정사를 광범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귀감을 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상당수의 중앙 행정 실무 관료들을 겸춘추로 편성하여 본직과 함께 기록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한명의 전임관 없이 모두 겸관으로만 구성한 것은 중앙 행정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일을 기록하겠다는 목적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조선시대 관료제의 운영에서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였던 전임 사관인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 등 여덟 명 외에 광범하게 겸임 사관을 운영한 것은 전임 사관만으로는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대소 관청의 모든 시행사를 기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즉 겸춘추를 비롯한 겸직제 운영의 의도는 행정 업무의 편리함과 유능한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활용, 국가의 예산 절감 효과 등 실용적인 인재 관리 목적 등과 연관된다.
무엇보다 겸춘추는 정1품 아문인 의정부에서부터 중앙 관아의 대부분 관료들로 구성된 것은 통치 행위와 관련된 시행사의 수집과 역사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겠다는 목적의식과 연관된다. 문행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사관의 책무를 겸임시키고, 그 위에 당상관을 두어 통솔하게 한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의 수집과 그 편찬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지배층의 의식이 투철하였음을 반증한다. 나아가 조정에서 당대의 사실을 역사서로 편찬하려고 하였던 적극적인 태도와 노력도 살필 수 있다.
겸춘추들은 매일의 일을 정리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고 문서로 보내야 했으며, 기록한 일기는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동향을 살피는 데 근거가 되었다. 전임 사관이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은 사실을 보충하였고,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시 자료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전임 사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나아가 지배층의 당대사 편찬 목적에 부합되는 임무를 수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겸춘추가 작성한 ‘겸춘추일기’는 지배층이 당대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과 직결된다. 따라서 겸춘추의 기록은 치도와 관련되고 후세에 권계가 되는 것을 수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겸춘추의 설치와 운영을 통하여 지배층의 역사의식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의 고조, 그리고 역사 편찬에 기울인 관심과 열의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욱이 여러 명의 관료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역사를 편찬하는 분찬의 성향이 확고하게 강화되었다는 점, 당대사 편찬이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의미 등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