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그림이나 설계도를 나타내는 말에는 양(樣), 화(畵), 도(圖), 도형(圖形)이라는 명칭이 있다. 화, 도, 도형은 사물을 묘사한 그림이나 설계도를 나타내지만, 견양(見樣)은 그림이나 도면뿐 아니라 본보기로 만든 물건을 의미하기도 해 다른 용어들에 비해 쓰임 범위가 넓다.
[내용 및 특징]
첫째, 견양은 어떤 물건의 본보기 물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다. 1470년(성종 1)에는 황제에게 바칠 물건의 견본을 태평관에서 보고 논의한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1년 5월 7일]. 또 1481년(성종 12)에는 왕이 한치형의 노리개 견본을 보면서 중국 사정을 논하였다[『성종실록』 12년 12월 22일]. 1493년(성종 24)에는 군기시 제조 심회 등이 각 고을에 지시해 화살의 견본품을 만들어 보내 왕이 직접 실험해볼 수 있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4년 1월 3일]. 『성종실록』의 1493년 10월 21일 기사에는 “전교하기를, ‘옳다. 다만 이는 정승이 아뢴 바이니, 내가 시험해보고자 한다. 속히 화살의 견양을 나누어 보내어서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24년 10월 21일]. 1502년(연산군 8)에는 어린애의 허리띠 한 벌을 상의원에 내려 똑같이 만들게 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는 시험지의 견본품을 여러 도에 내려보내 제조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일기』의 1502년 3월 29일 기사에는 “금과 구슬로 장식한 어린애 허리띠 한 벌을 내리며, ‘상의원으로 하여금 이 견양대로 만들어 오고 아울러 옛 띠도 수선하여 들여오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연산군일기』 8년 3월 29일].
『숙종실록』의 1700년 8월 14일 기록에는 “감시(監試)의 시지(試紙)는 해당 부서로 하여금 견양이 되는 종이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시지의 제조를 이에 준하여 어김이 없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다[『숙종실록』 26년 8월 14일]. 또한 『숙종실록』의 1711년(숙종 37) 12월 30일 기사에는 “복서(復書)의 등본(謄本)과 싸는 종이의 견양을 하나씩 아울러 올려 보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숙종실록』 37년 12월 30일].
두 번째, 견양은 사물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의미로 쓰인 사례가 가장 많다. 갑옷이나 신, 무기류, 배, 건축물 등을 보고 있는 그대로 묘사해 그린 것을 의미한다. 『태종실록』의 1414년(태종 14) 11월 4일 기사에는 “각도의 월과(月課) 갑옷은 일찍이 보낸 견본[見樣]에 의하여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중에 법식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죄주겠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영조실록』의 1776년(영조 52) 3월 7일 기사에는 “별간역 허규(許圭)가 어상 곁에 들어가 견양을 내었는데, 길이는 일곱 자이고 너비는 두 자 한 치이고 높이는 한 자 한 치였다.”라는 기록과 “왕세손이 어상(御床)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원상 김상철(金尙喆) 등이 어상 곁에 들어가 견양을 다시 냈는데, 안 길이는 여섯 자이고 안 너비는 한 자 일곱 치 한 푼이고 높이는 한 자 여덟 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 번째, 사물이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는 사례가 많지 않으며 배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면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도, 또는 도형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세종실록』의 1434년(세종 16) 9월 23일 기사에는 “임금이 병조에 명하기를, ‘이 뒤로 각도 각 포(浦)의 전함은 ‘동자(冬字)’와 ‘왕자(往字)’의 시험선(試驗船)을 견본으로 하여 만들고, 유구국 선장(船匠)이 만든 월자선(月字船)은 비록 위를 꾸민 것이 전함에는 불합하나, 그 하체가 견실하여 본받을 만하니, 또한 아울러 견양으로 삼으라고 각도에 행문이첩(行文移牒)하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의 1438년(세종 20) 1월 15일 기사에는 “‘연변 여러 구자에 보루를 쌓을 때에도 적대·옹성 및 연대의 견양을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에게 도본(圖本)을 만들게 한 다음, 도절제사에게 내려보내 이를 참고하고 쌓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옵소서.’ 하니…….”라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의 1473년(성종 4) 12월 14일 기사에는 “지난번에 신이 경회루의 견양을 보니 3층에 이르는데, 만약 그렇다면 지나치게 사치한 듯하니 구제(舊制)대로 수리하는 것이 편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성종실록』의 1493년(성종 24) 10월 21일 기사에는 “‘전일에 승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집의 도면을 고쳐 만들면서 전에 비하여 줄였으니, 지금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제도의 넓고 좁음과 재목의 크고 작음을 견양을 만들어서 들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의 1592년(선조 25) 9월 19일 기사에는 “약방 제조 윤두수(尹斗壽)가 대내(大內)에 지장(紙帳)을 둘러칠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두꺼운 종이를 올리고자 견양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상이 전교하였다. ‘삼군(三軍)이 추운 날씨에 노숙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지장을 둘러치고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기록이 있다.
설계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견양 외에 소양(小樣)으로 표현한 경우도 드물게 있다. 『성종실록』의 1478년(성종 9) 1월 23일 기사에는 선공감에서 영소문의 소양을 왕에게 보고했는데 왕이 보고 말하길 “나는 이렇게 사치스러울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도면이었기 때문에 사치 정도를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건축 설계도를 나타내는 데 ‘화(畵)’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물다. 화는 대개 풍경화처럼 순수한 그림을 나타낼 경우가 많다. 건축도를 나타낼 때는 가도(家圖)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으며, 가도는 건물의 배치도나 단위 건물도도 될 수 있고 구조나 상세를 알 수 있는 상세 도면도 된다. 도 앞에 건물 명칭을 붙여 ‘○○圖’로 표현한 것도 많다. 또 『산릉도감의궤』와 같은 책에서는 재실 등의 배치도를 나타내는 데 ‘간가도(間架圖)’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도와 도형은 차이점이 명확하지 않아 그 쓰임이 혼란스럽지만 『선조실록』에 따르면 “‘내반원(內班院)을 철거하고 그곳에다 동쪽으로 향하여 정전(正殿)을 앉히고 장랑(長廊)을 두른 다음 장랑의 절반쯤은 그대로 내반원과 선전관청으로 만들고 그 나머지는 사알(司謁)과 사약방(司鑰房)으로 만든다. 차비문(差備門)을 개천 위 다리가로 이설하고 못 서쪽에 담장을 쌓아 내외를 막음으로써 잡인으로 하여금 지금의 차비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 대내의 체모도 근엄하게 되고 공역도 방대한 데 이르지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도를 그려 살펴보니 이 의논이 가장 근접하여 감히 이를 도형으로 만들어 받들어 아뢰니 성상께서는 재량하소서.”라고 한 문맥이 있다[『선조실록』 38년 11월 24일]. 이로 미루어 설계도면을 일차적으로 만들어 살펴본 것은 ‘도’라 표현했고, 정식으로 왕에게 보고할 도면으로 작성한 것은 ‘도형’이라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도와 도형은 거의 구분하여 쓰지 않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형이 도에 비해 격식이 있고 보고용으로 잘 꾸며진 설계도를 지칭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건도감의궤』에서는 도면을 실은 부분의 제목을 ‘도형’ 또는 ‘도설(圖說)’로 표현하였다. 도형이나 도는 그림만 있는 경우이고, 도설은 도면과 함께 건물의 규모나 형식 등을 설명한 것이 부가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하였다.
[의의]
견양은 현재 본보기로 만든 물건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지만, 원래 의미는 건물이나 물건의 모양을 보고 그린 그림이나 조영물을 만들기 위해 작성한 설계도면을 의미하였다. 서양식 도면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한국 고유의 도면 명칭을 찾는 데 견양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