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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監營)

서지사항
항목명감영(監營)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지방행정기구(地方行政機構)
하위어강원감영(江原監營), 경기감영(京畿監營), 경상감영(慶尙監營), 전라감영(全羅監營), 충청감영(忠淸監營), 평안감영(平安監營), 함경감영(咸鏡監營), 황해감영(黃海監營), 원영(原營), 기영(箕營), 기영(畿營), 영영(嶺營), 완영(完營), 금영(錦營), 해영(海營)
동의어관찰부(觀察府), 관찰사영(觀察使營), 상영(上營), 순영(巡營), 영문(營門)
관련어관찰사(觀察使), 선화당(宣化堂), 영읍(營邑), 감서리(監書吏), 장청(將廳)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집무하던 관청.

[개설]
조선시대의 감영(監營)은 팔도(八道)에 각각 설치되었기 때문에 모두 여덟 곳에 있었다. 팔도의 감영은 각각 별칭이 있어서 경기감영은 경기의 ‘기’를 붙여 기영(畿營), 충청감영은 감영 고을 공주가 금강을 끼고 있었으므로 금영(錦營), 경상감영은 영남에서 유래된 영영(嶺營), 전라감영은 전주의 옛 이름 완산주의 머리글자를 취한 완영(完營)으로 불렸다.

황해감영은 해주에 있었으므로 해영(海營), 강원감영은 원주에 있었으므로 원영(原營), 함경감영은 함흥에 있었으므로 함영(咸營), 평안감영은 패수 즉 대동강에서 유래한 패영(浿營), 평양의 이름 유경(柳京)에서 유래한 유영(柳營), 또는 기자의 옛 터전이라고 하여 기영(箕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의 감영은 관찰사가 순찰사직을 겸하면서 순영(巡營)으로도 불렸다. 감영의 명칭은 1910년(순종 4) 관찰사가 도장관(道長官)으로 바뀌면서 도청으로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감영은 조선시대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고, 관찰사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기 위한 인원과 직제가 갖추어지면서 관련 종사자들의 상주를 위하여 설치되었다. 팔도 감영의 설립은 관찰사제의 실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관찰사는 고려시대의 안찰사(按察使) 또는 안렴사(按廉使) 제도를 이어받은 것으로 안찰사가 임시적인 순찰관의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관찰사는 왕조의 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임기가 확립된 전임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한 도(道)의 장관으로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일정한 장소에 전임 기구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를 감영이라 한다.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파견되면서 고려후기 창왕대에는 이미 관찰사영의 영리(營吏)들이 등장하였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는 경관을 구전차출(口傳差出)하여 도관찰출척사를 겸대하게 하였던 구전겸대제도(口傳兼帶制度)를 폐지하고 관찰사를 별도로 제수하여 오로지 한 임무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한편,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관찰사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여 종4품 경력(經歷)이나 혹은 종5품 도사(都事)로 하여금 관찰사를 보좌하게 하였는데, 이와 같은 관찰사 경력사와 영리의 등장 시기를 감영이 구성된 시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말선초에는 아직 관찰사제가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하고 관찰사와 안렴사가 교차 파견되던 상태였다. 태조는 「즉위교서(卽位敎書)」에서 각 도의 안렴사가 해야 할 일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여말에 이미 각 도에 안렴사가 파견되었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이후 1393년(태조 2) 9월 관찰사제가 회복되면서 양계(兩界) 이남(以南)에 관찰사제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감영의 설치는 이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감영의 조직은 팔도의 감영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감영을 구성하는 기구는 인적 구성과 물적 구성으로 나눌 수 있다. 감영의 인적 구성은 한 도의 행정·군사의 최고 책임자인 종2품 관직의 관찰사와 관찰사를 보좌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되는 중앙 관원, 그리고 행정 실무를 맡고 있는 지역민인 이예직(吏隸職)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으로는 수령관(首領官)에 해당하는 경력 또는 도사와 종5품 판관(判官), 종6품 교수(敎授) 및 종9품 훈도(訓導)·종9품 심약(審藥)·종9품 검률 등이 있었다.

도사는 여말 이래로 경력과 함께 관찰사의 수령관으로 통칭되던 관찰사의 수석 보좌관으로 종5품관이었다. 1465년(세조 11) 경력이 없어진 이후에도 도사는 19세기 말까지 계속적으로 파견되었다. 도내를 순력하는 관찰사를 수행하면서, 불법을 범한 수령을 추국(推鞠)하고 관찰사와 함께 수령들의 근무 성적을 평정하는 포폄등제(褒貶等第)를 정하였으며, 관찰사 유고 시에는 관찰사의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도사는 관찰사의 보좌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찰사와 수령들의 불법을 규찰하여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탄핵하는 직계논탄권을 보유하였던 지방의 어사대, 즉 외대(外臺)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도사는 외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관찰사의 하급 관리로 자리하게 된다.


중군(中軍)
은 임진왜란이 계속되던 1593년(선조 26) 훈련도감이 설치되면서 훈련대장 밑에 종2품의 중군을 두었던 것이 그 시초인데, 그 뒤 점차 감영과 병영에도 중군직이 설치되었다. 1593년 2월의 행주산성 전투에서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의 밑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전공을 세웠던 조경(趙儆)이 바로 권율의 중군이었고, 1606년(선조 39) 함경감사 이시발(李時發)에게도 중군 박난영(朴蘭英)이 있었으며, 1595년(선조 28) 황해병사 구사직(具思稷)에게도 중군이 있었다.

이렇게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 직제에 등장한 중군직은 감영과 병영에도 도입되어 1760년대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모든 도의 순영과 병영에 중군이 설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영의 중군은 일반적으로 순영중군으로 호칭되던 정3품 당상 무관으로서, 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보좌하고 관찰사의 직속 부대인 순영속아병을 총지휘하였다. 19세기 중엽의 전라도 순영속아병의 군사 조직은 중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한 마병별대 12초, 3부 6사의 군대 30초로 편성되어 있었으나, 순영중군은 휘하에 마병별장과 3천총(千摠) 6파총(把摠) 42초관(哨官)을 거느리고 있었다.

심약은 조선전기 이래 각 도의 감영에 상주하였던 관찰사의 의료 보좌관으로서 종9품관이었다.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의 의원 중에서 차임하여 파견하였는데, 관찰사의 순력에 수행하며 질병으로 신음하는 인민들을 치료하고, 관찰사의 건강과 질환에 대해 상담하고 약을 조제하며, 도내 관인들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을 조달하였다. 검률은 조선전기 이래 감영에 파견되었던 관찰사의 법률 보좌관으로서 종9품관이었다. 검률은 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범죄 사건을 조율하고 그 처리 방안을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감영에 비장(裨將)이 있었다. 비장은 조선전기 이래로 변진이나 변성에 설치하였던 무관직으로서 대장·장수·원수들을 보좌하는 부장직이었지만, 때로는 부장직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관찰사에게 비장이 없었다. 군관이 있었으나 군관은 비장이 아니었으며, 관찰사의 신변 보호와 업무 수행을 보좌하던 사적인 비서관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관찰사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하게 되면서 관찰사가 주장이 되고, 그 밑에 비장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군사와 행정을 분담하여 중군은 관찰사의 수하친병(手下親兵)인 군영속아병의 총지휘관으로, 비장은 대솔군관 혹은 계청군관이라는 호칭으로서 관찰사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는 사적 보좌관의 직임으로 분리되어 갔다. 이렇게 등장한 조선후기의 비장들은 관찰사를 대신하여 많은 행정 실무를 수행하였다.

비장은 영리들이 작성한 곡부를 감사하고, 관찰사를 대신하여 도내 농사가 진행되어 가는 형편을 살피며, 군현에 저장되어 있는 유고곡의 수확 관리에 난잡함이 없는지 조사하였다. 또한 재해를 입은 지역의 이재민들을 위문하고, 수령들의 현부와 근만을 염탐하였다.

비장에는 관찰사가 출행할 때 앞뒤에서 화살집을 메고 호위하는 전배비장·후배비장과 육방비장을 포함하여 대체로 8명~9명의 비장이 있었는데, 대개 행정 실무에 밝은 전관인들을 관찰사가 국왕에게 아뢰고 차임하였다. 19세기에는 육방비장 외에도 보군비장·고마비장·영고비장·선자비장·진휼비장 등 군관 대신 비장으로 호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 업무가 다양해짐에 따라 점차 비장의 수도 늘어났다.

영리는 관찰사의 사무 기구인 감영의 이서들을 말한다. 영리는 원래 영방의 육방(六房)과 색리(色吏)를 의미하였으나, 광의로서의 영리에는 승발(承發)·계서·통인(通引)·마두(馬頭)까지도 포함된다. 영리는 육방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내무직과 외무직의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영리와 인리(人吏)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영리는 순력하는 관찰사를 수행하면서 군현의 통치 행정 수행을 보좌하고 군현에 대한 감독과 규찰을 담당하던 외무였으며, 인리는 감영 자체를 꾸려 가는 일을 담당하는 내무였다. 영리들은 번차에 따라서 매월 교대로 입번하여 도내를 순력하는 관찰사를 수행하면서 수령들의 직무에 관계되는 일을 염탐하기도 하고, 관찰사를 도와 소장을 처리하는가 하면 관찰사가 국왕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관찰사가 처리하는 부첩이며 곡부·보장·소첩들도 실은 모두 영리들이 담당하여 처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감영의 관아 시설물이 점차 갖추어졌다. 조선전기 6도의 경우에는 감사가 도내 제읍을 순력하는 과정에서 점차 늘어난 계수관(界首官)이 주영 또는 유영으로 존재하면서 도내 각종 공사 집행의 중심지, 진상(進上) 봉상(封上), 감시 및 도내 각종 공부의 보관소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므로 양계감영이나 조선후기 팔도 감영처럼 선화당(宣化堂)·징청각과 같은 상설 관아 시설이 필요 없었으나, 관찰사의 임기가 2년으로 늘어나고 해당 읍의 수령직을 겸하게 되면서 점차 상설 관아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감영은 감사의 관아를 비롯하여 속료들의 아사(衙舍), 이예들의 거소, 기타 관루·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영의 일반적인 배치 구조는 관찰사의 영역이 중심을 차지하고, 부속 관원들의 실무처와 비관원 실무 행정 관료들의 영역으로 구별된다. 관찰사가 서무를 집행하는 선화당은 삼문으로 구성되어 권위를 상징하며, 감영 전체 배치 구성의 중심축을 담당한다.

감영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관둔전(官屯田)과 늠전(廩田)으로 충당하였다. 지급 규모는 관둔전 20결, 늠전 80결로 판관이 있을 경우에는 40결을 더 주되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을 경우 20결을 지급하였으며, 공수전(公須田) 15결로 되어 있다. 소속 노비는 450명이었으며, 전라도·함경도는 600명이었다.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工匠]은 지역에 따라 차등을 두어 경기감영에는 1명, 충청감영에는 19명, 경상감영에는 39명, 전라감영에는 19명, 강원감영에는 22명, 황해감영에는 19명, 평안감영에는 11명, 함경감영에는 6명이 있었다.

[변천]
감영은 여말선초에 등장하였지만, 실제 감영 기구의 설립 시기는 팔도마다 일정하지 않아 차이가 있었다. 감사의 소재 읍 또는 그 도의 본영을 감영이라 할 때, 그것은 감사가 솔권겸윤(率眷兼尹) 하는 양계와 단신(單身) 도계하는 남부 6도와는 사정이 서로 달랐다. 양계의 감영인 평양과 함흥은 후기의 팔도 감영처럼 동일한 기구와 시설을 갖추었지만, 남도의 6도는 단지 도정을 종합하는 중심지 내지는 감사가 순력할 때 일시적으로 휴식하는 곳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전기 6도의 감영 소재지를 보면, 경기도는 수원(현 광주), 충청도는 청주 또는 충주, 경상도는 상주, 전라도는 전주, 황해도는 해주, 강원도는 원주였다. 조선전기 각 도의 감영은 도내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또 서울에서 도의 경계 지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임기 1년간 도내 여러 고을을 항상 순력해야 하는 6도 감영은 17세기 이후처럼 도의 중앙에 위치할 필요성이 적었다. 경상감영의 경우 건국 초기에는 경주에 있다가 1408년(태종 8)에 상주로 옮겼는데, 그 연유는 왕화(王化)의 유행은 상주에서 남으로 전파되지 경주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향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조선시대 왕궁이 있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팔도가 사방으로 번병(藩屛)해 있지만 각기 해도에서 서울로 오는 것을 상경으로 표현했듯이, 팔도의 감영도 도계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계수관에 위치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관찰사의 임기가 2년으로 늘어나고, 관찰사가 도내 큰 고을의 수령직을 겸하게 되면서 감영 고을도 도내의 중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상도의 감영은 상주에서 대구로 옮겨지고, 충청도의 감영은 청주에서 공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팔도 감영의 위치는, 경기는 서울 돈의문 밖, 충청도는 공주, 경상도는 대구, 전라도는 전주, 황해도는 해주, 강원도는 원주, 함경도는 함흥, 평안도는 평양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조선의 국권이 피탈되면서 감영은 폐지되었다.

[의의]
조선시대 감영 기구가 설치된 고을은 전근대 시기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 경제의 중심지이며, 지방 문화의 중심지였다. 20세기에 이르러 근대 도시의 등장으로 일부의 감영 도시는 쇠퇴하였으나, 일부는 근대 도청 소재지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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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선빈, 「충청감영 역사기록 정리의 성과와 과제」, 『지방사와 지방문화』1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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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호, 「조선시대 강원감영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임선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