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 사관이 작성하는 사초 중 집에 두고 보관하면서 추가로 기록하거나 사평을 적은 사초.
[개설]
사초(史草)는 사관(史官)이 작성하여 집에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와 예문관(춘추관)에 보관하는 사초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사초는 사관들이 폭넓게 견문을 기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사초를 두 부로 작성한 것은 그 중 한 부가 어떤 이유로든 분실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가장사초는 조정이나 민간에서 듣는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세평(世評) 등을 종합하여 자신의 의견을 적을 수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는 사평(史評)은 거의 가장사초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이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폭넓은 논평도 가장사초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만든 것은 가장사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찬/발간 경위]
1434년(세종 16) 춘추관에서는, 관청에 보관하는 시정기(時政記)는 누구나 아는 사실만 기록할 뿐이므로, 사관의 견문이 미치는 인물의 현부(賢否)나 득실(得失), 여러 비밀스런 일에 이르기까지도 상세히 직서(直書)하여 후일 춘추관에 수납하게 하도록 법령을 정하였다[『세종실록』 16년 11월 5일]. 그러나 사초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작성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기명(記名)을 시행하게 되자 『세조실록』을 편찬하던 과정에서 후환이 두려워 사초를 고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민수(閔粹)의 옥사가 그것이다. 연산군 때는 이극돈(李克墩)에 의해 김일손(金馹孫)의 사초가 누설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하기도 하였고, 연산군이 시정기를 열람하자 사관들이 보복이 두려워 가장사초를 태우기도 하였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하여 중종반정 이후 『조선왕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초를 누설하면 엄벌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중종실록』 2년 6월 17일].
[서지 사항]
가장사초는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사초는 정태제(鄭泰齊)의 사초와 윤동승(尹東昇)의 『한간비초(汗簡秘草)』가 있다. 정태제의 사초는 무덤에서 발굴되었고, 윤동승의 사초는 어떤 경위로 현존하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구성/내용]
정태제의 사초는 비초(飛草)인 시정기 부본(副本)과는 달리 괘선이 그려진 용지에 잘 정리된 자료이고, 인물평과 시사에 대한 평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서 가장사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윤동승의 『한간비초』도 정태제의 사초와 마찬가지로 괘선이 그려진 용지에 획이 바른[楷正] 글씨로 날짜별 기사를 쓰고 자신의 견해를 근안(謹按)이나 사실의 해설 등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정태제의 사초에는 ‘근안’, ‘사신왈(史臣曰)’, ‘사관왈(史官曰)’ 등으로 시작되는 사평을 각 중요 기사에 57건이나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