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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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묘(家廟)

서지사항
항목명가묘(家廟)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사당(祠堂)
관련어가묘제(家廟制), 가묘제(家廟祭), 납길(納吉), 신주(神主), 원묘(原廟), 천신(薦新)
분야생활 풍속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유교를 신봉하는 사대부 계층의 집안에서 조상의 신주(神主)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제사용 건축물.

[개설]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을 사당(祠堂)이라고 한다. 곧 사당은 조상의 영혼을 모신 곳이다. 왕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을 태묘(太廟)라고 하고, 제후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종묘(宗廟)라고 하며, 사대부들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을 가묘(家廟)라고 한다. 일반 서민들은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정침(正寢)에서 부모의 제사만 올리도록 하였다.

고례(古例)에 따르면 왕의 태묘에서는 7대의 조상을 제사하고, 제후의 종묘에서는 5대의 조상을 제사하며, 사대부들의 가묘에서는 2대나 1대의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사대부의 가묘에서도 고조부모에서 부모에 이르기까지 4대의 조상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것이 보편적인 예법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가묘는 보통 살림집인 정침의 동북쪽에 짓지만, 지형에 따라 서북쪽에 짓기도 한다. 대개 3칸 집으로 세우는데, 내부는 하나의 큰 방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북쪽 벽에 시렁을 달고 4칸으로 격판을 세워 감실(龕室)을 만든다.

죽은 이는 서쪽이 상위이므로, 서쪽 감실에서부터 고조부모·증조부모·조부모·부모의 신주를 순서대로 모신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조상의 감실은 비워 두는데, 예를 들어 조부모와 부모의 신주만을 모신다면 서쪽의 두 감실은 비워 두는 것이다. 각 세대의 감실 앞에는 각각 제상(祭床)을 놓으며 중앙에 향안(香案) 하나를 놓고 그 위에 향로와 향합(香盒)을 올려놓는다.

가묘를 지을 형편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살림집의 방 1칸을 가묘로 정해 조상의 신주를 모신다. 방 1칸마저 여유가 없을 때는 신주를 넣은 상자를 다락이나 벽장에 모시거나 벽에 붙여서 걸기도 하였다. 특히 기제(忌祭)와 같이 특정 조상만을 제사하는 경우에는 그 조상의 신주만 정침으로 모셔 와서 제사하였다. 가묘는 사당집이 어느 쪽을 향하든지 뒤편을 북쪽으로 간주하여 의례의 방위를 잡는다.

가묘에는 신주를 모신 것 외에 각종 제기(祭器)제복(祭服), 그리고 선조들의 초상화나 족보·문집과 같은 집안의 귀중한 문헌들을 적당한 용기에 담아 보존하기도 한다. 화재나 수해와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먼저 신주와 문헌들을 반출하고, 그다음에 제기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다. 만일 가묘가 모두 불에 탔을 경우에는 3일 동안 곡(哭)을 한다. 신주가 불에 타 버렸을 때는 가묘가 있던 자리에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새로 만들어 모신 다음 분향한 후 고유제(告由祭)를 올린다.

가묘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동쪽 계단을 조계(阼階)라고 하고 서쪽 계단은 서계(西階)라고 한다. 조계는 오로지 주인만이 오르고 내릴 수 있다. 주부나 다른 사람들이 중문으로 오르내릴 일이 있을 때는 오직 서쪽 계단만을 이용할 수 있다. 비록 주인보다 항렬이나 나이가 높은 어른일지라도 조계로는 오르내리지 않는다.

가묘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던 사람이 죽어서 삼년상이 끝난 후 그를 새로이 가묘에 모실 때가 되면, 이전에 가묘에 모셔진 신주를 체천(遞遷)한다. 즉 세대가 바뀌었으므로 5대조의 신주를 가묘에서 내어보내고, 그 자리(감실)에 고조부모의 신주를, 고조부모의 자리에는 증조부모를, 증조부모의 자리에는 조부모를, 조부모의 자리에는 부모를, 그리고 부모의 신주가 봉안되었던 감실에는 새로 부묘(祔廟)하는 신주를 모시는 것이다.

가묘에서 내어보낸 5대조의 신주는 가장 항렬이 높은 후손의 집으로 모시거나 묘소에 묻는다. 그리고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바뀌었으므로 신주마다 표제를 다시 쓴다. 이를 개제(改題)라고 한다. 즉 신주를 고쳐서 쓰는 것은 1세대를 지날 때마다 행하고, 그때마다 체천을 하는 것이다. 가장 큰 종가의 시조(始祖)가 되는 사람은 4대가 지났다 하더라도 체천하지 않고 사당을 따로 세워 영구히 제사한다. 이를 불천묘(不遷廟)라고 하고, 그 제사를 불천위(不遷位) 제사라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시조뿐만 아니라 입향조(入鄕祖)의 경우에도 체천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가묘에 모시는 조상의 범위는 자신이 제사하는 조상의 범위와 일치한다. 가령 4대가 장자·장손으로 내려온 집의 경우에는 4대 봉사(奉祀)를 하게 되므로 고조부모·증조부모·조부모·부모까지의 신주를 가묘에 모시지만, 부모의 제사만 지내는 집에서는 부모의 신주만 가묘에 모신다.

[변천]
사당은 기원전 12세기 이전 중국의 은(殷)나라에서부터 건립되었다. 은나라의 왕실에는 선조들을 제사하는 종묘가 있었는데, 직계 조상들을 모신 큰 사당과 방계(傍系) 조상들을 모신 작은 사당이 있었다. 전자를 대종(大宗)이라고 하고 후자를 소종(小宗)이라고 하였다.

은나라의 사당에서는 나무로 만든 신주를 봉안하였다. 은나라를 이은 주(周)나라는 사당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왕의 태묘는 7채의 사당을, 제후의 종묘는 5채의 사당을, 대부급의 가묘는 3채의 사당을, 사(士)급은 1채 혹은 2채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중국 고대의 종묘는 후대와는 달리 선조마다 각각의 사당을 지었던 것이다.

사당은 보통 궁궐 옆이나 집 안에 짓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한(漢) 나라 때부터는 능이나 묘 앞에 세우는 일이 많았다. 송(宋) 나라 때부터 중소 지주 출신의 사대부 계층이 정치·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가묘나 초상화를 모시는 사당인 영당(影堂)을 세우는 일이 크게 유행하였고, 이것이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와 주자의 『가례』에서 장려되어 이후 중요한 유교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시조 왕들을 제사하기 위한 사당들이 세워졌고, 이후 역대의 왕들을 모시는 종묘로 발전하였다. 신라에서는 문무왕(文武王) 때 전형적인 제후국의 5묘제 종묘가 설립되어 있었다. 가야에서는 시조의 사당(수로왕묘)에 역대의 왕들이 함께 모셔졌다. 이후 왕실에서는 종묘를 세우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유교식의 사당은 사회에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원(元)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주자의 『가례』가 도입된 후 사대부들 가운데 가묘를 세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법령으로 ‘사대부가제의(大夫家祭儀)’가 제정·반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시 보편화되어 있던 제사의 윤행(輪行) 관습을 지양하고 종자(宗子)가 그것을 주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신분에 따라 제사의 대수를 한정하여 가묘를 건립하게 되었다.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가례』의 시행이 장려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문무 관료들에게 가묘를 세우도록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이러한 국가의 시책에도 불구하고 가묘가 잘 세워지지 않았으나, 성리학이 크게 발달하게 된 조선 중기부터는 대부분의 양반 가문에서 가묘를 건립하였다. 이후 가묘는 전통 예속이 되어 유교 제례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791년(정조 15)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조상의 신주를 훼손한 사건이 발생하여 유교 의례에 대한 동요가 일어나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1910년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유교 의례가 더 이상 강제되지 않았으므로 가묘를 설치하는 집이 드물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 의례를 지키는 명문가에서는 현재까지도 가묘를 모시고 있다.

[의의]
가묘는 대종이나 소종의 종가에 설치되고 종손에 의하여 관리되는 것이므로, 동종의 친족들을 결합시키고 유대를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가례(家禮)』
■ 『가례집람(家禮輯覽)』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사례편람(四禮便覽)』
■ 『상례비요(喪禮備要)』
■ 『상변통고(常變通考)』
■ 『예기(禮記)』
■ 『오복각의(五服各義)』
■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 『의례(儀禮)』
■ 『주례(周禮)』
■ 김두헌, 『한국가족제도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69.
■ 이영춘, 『차례와 제사』, 대원사, 1994.
■ 고영진, 「15·1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21, 1989.
■ 고영진, 「조선 중기 예절과 예서」,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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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철수, 「주자 『가례』에 나타난 사당의 구조에 관한 연구」,『한국의 사회와 문화』22,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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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이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