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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검점군(檢點軍) 및 순검군(巡檢軍)이 개경의 도적을 방비하거나 범죄자를 잡아두기 위해 설치한 치안 기구.
[내용]
가구소(街衢所)는 1076년(고려 문종 30)에 설치되었는데, 개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검점군(檢點軍) 혹은 순검군(巡檢軍)이 도성과 궁성의 안팎에 대한 방범과 체포된 죄인을 구류하는 치안 기구였다.
고려시대 치안 기구인 검점군은 시리검점(市裏檢點)·가구감행(街衢監行)·좌·우경리검점(左·右京裏檢點)·오부검점(五部檢點)·사교세작(四郊細作) 등의 업무를 시행하였다. 특히 가구감행은 장교(將校) 2명, 나장(螺匠) 11명, 도전(都典) 11명, 군인(軍人) 40명이 배치되었는데, 그 명칭과 업무의 내용을 고려할 때 가구소와 밀접히 관련하여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인집권기 가구옥은 흔히 장군 등에 의하여 임의로 사람을 잡아 가두는 데 이용되었다. 구소는 본래 안문(按問)·치죄할 수 있는 기관이었으나, 무신이 득세한 이후로는 흔히 장군세력에 의부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가구소는 독립적인 권력기관의 기능을 상실하고 권세가에 붙어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고려후기 가구소는 고종대 그 명칭이 다시 등장하고, 충렬왕대 뇌물을 받은 비리 관리를 투옥하는 등 그 치안 기구로서의 명맥이 유지되었다. 또한 1277년(고려 충렬왕 3) 순마소(巡馬所)가 창설되어 개성의 방도(防盜)와 야간 순찰을 전담한 후에도 일정 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1392년(태조 1) 조선왕조 개창 후 마침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