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 인형극, 발탈, 동물가장가면희, 줄타기, 농환(방울받기), 솟대타기, 땅재주, 버나, 환술, 동물재주부리기, 나무다리걷기, 충협, 풍물, 무당굿놀이, 우희, 재담, 농악, 판소리 등 한국 전통연희 자료를 총합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자료문의 :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 02-3290-5872
협률사(協律社)는 관립극장 및 관영 성격의 연희회사, 지방순회공연을 위한 전통연희단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중복 사용된 용어이다. 그리고 협률사(協律司)는 장악원(掌樂院)의 후신인 교방사(敎坊司)의 이칭이었으며, 협률사(協律舍)는 1895년 인천에 세워진 사설극장의 명칭이었다.
우선 협률사(協律司)는 교방사(敎坊司)의 이칭으로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협률(協律)’이라는 말의 어원은 조선시대 궁중음악과 관련한 업무를 관장했던 장악원(掌樂院)의 음악적 활동과 관련이 깊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제례와 연회 등 궁중행사에 사용하는 악(樂)과 관련된 일을 협률, 이것을 관장하는 직책을 협률랑(協律郞)이라고 불렀다. 장악원의 업무는 1895년 궁내부 소속의 장례원(掌隷院)에 예속되었으며, 장례원에 속해 있던 협률과(協律課)는 1900년에 교방사(敎坊司)로 승격되었다. 궁내부 소속으로 음악을 관장했던 교방사는 협률사(協律司)라는 이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전에 협률과가 하던 업무를 그대로 승계하여 확장한 조직이 교방사였으므로, 새로 제정된 교방사라는 이름 대신에 협률과의 과(課)를 사(司)로만 바꾸어 협률사(協律司)라고 불렀던 것이다. 협률사에서는 고종의 어극(御極)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한 업무도 진행했다.
다음으로 협률사(協律舍)는 부산 출신의 인천 갑부였던 정치국(丁致國, 1865-1924)이 1895년에 인천 용동(龍洞)에 세운 실내극장의 이름이다. 고종의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설립했던 희대(戱臺)가 ‘최초의 실내극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정치국이 세웠던 협률사(協律舍)가 그보다 7년이나 앞선 극장이었다. 청일전쟁 중에 지었던 단층 창고를 극장으로 만들어 썼는데, 여러 번에 걸쳐 확장 공사를 했을 만큼 극장은 성황리에 운영되었다. 이곳이 바로 현재 애관극장(愛館劇場)의 전신이다.
그리고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온 명칭인 협률사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협률사가 관영 성격의 연희회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예이다. 1902년에 설치된 희대에서 치루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고종의 어극 40년 칭경예식이 갑작스런 괴질의 유행으로 갑작스럽게 연기되자, 기다리는 동안 “여기에 모인 예인(藝人)들을 활용하여 군악대의 경비를 보충한다”라는 명목 하에, 일반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관영 성격의 연희회사(演戱會社)가 설립되었다. 협률사는 바로 그 연희회사의 이름이다. 칭경예식 준비의 일환으로 연희자 관리를 위해 삼패도가(三牌都家)를 조직했던 당시 시위대참령(侍衛隊參領) 장봉환(張鳳煥, 1856-?)이 협률사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 역시 연희회사 협률사의 주도 하에 판매된 공연이었다. 협률사는 이처럼 희대라는 특정 공간에 연희자들이 상주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연희를 판매하고 영리를 추구하는 연희회사로서 기능했지만, 몇 차례 열고 닫기를 반복하다가 1904년에 결국 폐지되었다. 1906년에는 몇몇 친일관료와 일본자본에 의해 사영(私營) 성격의 연희회사로 복설되기도 했다.
둘째, 협률사가 관립극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예이다. 19세기 이후 서울이 상업도시로 번창해감에 따라 연희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가 팽배해졌고, 이에 따라 기존 건물을 연희장으로 개조한 공간이 하나 둘 생겨났다. 이 무렵 고종의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치루기 위한 목적으로 봉상시(奉常寺) 건물 일부를 터서 서구식 극장 형태의 전문 연희공간인 희대를 설치했다. 애초에 협률사라는 이름은 이 건물에 상주하면서 운영․관리하고 공연 사업을 벌였던 연희회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먼저 사용되었지만, 이후 그 희대 건물까지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전술한 대로 칭경예식 행사 자체가 한 해 연기되면서, 희대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 연희와 무용 등을 공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연희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7년 2월초 무렵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가 관립극장 협률사의 건물을 점유하게 되면서 극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1907년 12월경에 경시청이 이곳을 다시 연희장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1908년 3월을 전후해 현영운(玄暎運, 1868-?)이 주축이 되어 희대 구조 변경 공사를 진행했으며, 이곳은 원각사(圓覺社)로 재개관되었다.
셋째, 20세기 전반에 지방순회공연을 위한 전통연희단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예이다. 협률사라는 용어가 다층적으로 사용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목적으로 조직한 판소리 창자 중심의 전통연희 전문단체로서의 협률사에 한해 ‘민간협률사’라는 별도의 명칭을 쓰기도 한다. 그에 대비되는 개념은 ‘궁중협률사’로, 희대와 삼패도가의 예인들을 활용해 공연 사업을 벌였던 관영 성격의 연희회사를 의미한다. 민간협률사는 191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관영 연희회사인 협률사 소속으로 희대에서 공연했던 연희자들은 그 체제를 계승한 원각사를 비롯하여 장안사, 연흥사, 광무대 등 여러 사설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이 재정난으로 인해 파행적인 운영을 지속하거나 폐관의 위기를 맞게 되자, 연희자들은 자발적으로 민간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에 나섰다. 민간협률사의 연희자들은 포장식 이동극장 무대에서 판소리, 줄타기, 재담, 풍물 등을 공연했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이 남원에서 조직한 송만갑협률사, 김채만(金采萬, 1865-1911)이 광주 및 능주 지역의 창자들을 모아 조직한 광주협률사, 김창환(金昌煥, 1855-1937)이 나주에서 조직한 나주협률사, 김봉이(金鳳伊)가 경북 김천에서 조직한 김봉이협률사, 김창룡(金昌龍, 1872-1943)이 충청 지역에서 조직한 김창룡협률사 등이 당시 이름을 날렸던 민간협률사이다. 비록 훌륭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전통연희를 대체할 만한 뚜렷한 오락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지방의 여건상, 대명창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민간협률사의 공연은 매우 큰 구경거리였다. 민간협률사의 활동은 194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장기간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기에 의해 평소 인맥이 있던 연희자들끼리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공연 후 해체하기를 반복하는 형태였다. 이 시기의 민간협률사 단체로는 신영채(申永彩, 1915-1950?), 조몽실(曹夢實, 1900-1949), 박초월(朴初月, 1917-1983), 박귀희(朴貴姬, 1921-1993) 등이 참여한 임방울일행, 홍정택(洪貞澤, 1921-2012)․김유앵(金柳鶯, 1931-2009) 등이 참여한 김옥진협률사 등이 있었다. 민간협률사의 공연은 대개 승무로 시작하여 단가나 판소리 몇 대목의 독창, 〈흥타령〉, 〈육자배기〉, 〈성주풀이〉, 〈새타령〉과 같은 민요나 잡가의 합창, 20-30분에 걸친 촌극 즉 토막창극의 순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다른 연희들이 부분적으로 추가되는 형식이었다.
【참고문헌】
성기련, 〈1930년대 판소리 음악문화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성기련, 〈1940-1950년대의 판소리 음악문화 연구〉, 《판소리연구》22, 판소리학회, 2006.
유민영,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 태학사, 1998.
조영규, 《바로잡는 협률사와 원각사》, 민속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