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 인형극, 발탈, 동물가장가면희, 줄타기, 농환(방울받기), 솟대타기, 땅재주, 버나, 환술, 동물재주부리기, 나무다리걷기, 충협, 풍물, 무당굿놀이, 우희, 재담, 농악, 판소리 등 한국 전통연희 자료를 총합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자료문의 :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 02-3290-5872
【정의 및 이칭】
판소리는 청중이 모인 판에서 부채를 든 한 명의 소리꾼(광대)이 북 반주를 수행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노래(창), 말(아니리), 몸짓(발림)을 섞어가며 서사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공연예술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결합된 말이다. ‘판’은 특정한 놀이나 행위가 벌어지는 공간을 의미하는데, ‘씨름판’, ‘놀이판’, ‘살판’, ‘죽을판’, ‘난장판’, ‘먹자판’, ‘판굿’, ‘판줄’, ‘판염불’, ‘판춤’ 등에서 그러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소리’는 우리 민속악의 성악(聲樂) 예술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도판 1-2)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공연예술인 판소리에는 다채로운 인간 경험과 사상․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소리꾼은 소리판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발휘하여 “완급장단(緩急長短)과 억양반복(抑揚反復)을 법도에 맞도록 창거창래(唱去唱來)”하며 청중에게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창-아니리의 교체, 비장-골계의 교직을 통한 긴장-이완 즉 맺고 풀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가운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다. 판소리는 기쁨과 슬픔 뿐만 아니라 장중함, 화평함, 유유함도 맛보게 해 준다. 다시 말하면 다채로운 감정의 촉발을 경험하게 하여 예술적 감흥을 맛보게 하는 것이 판소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창자와 고수, 청중 간에 이루어지는 직접적이고 원활한 심리적 교감 및 상호 소통 즉 열린 ‘판’의 구성이다.
판소리는 장단에 맞춰 노래하면서 상황을 전개해 나가는 ‘소리’(혹은 ‘창’)와 이야기하듯 말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아니리’, 그리고 소리하는 이가 소도구인 부채 및 다양한 몸짓과 표정 등으로 극적인 상황을 그려내는 ‘발림’(‘너름새’ 혹은 ‘사체’)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소리와 아니리, 발림으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광대의 역할만으로 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고수(鼓手)의 북장단과 청중들의 추임새가 여기에 어우러져야 한다. 책상다리로 앉아 허리를 펴고 소리꾼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소리 도중에는 적절한 동작과 안정된 반주로 창자와 호흡하는 ‘자세’, 소리의 가락이나 이야기의 진행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넣는 ‘추임새’, 맛깔스럽게 소리와 조화되는 ‘장단’이 고수에게 요구되는 세 요소이다. 추임새는 ‘추어준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으잇’, ‘얼씨구’, ‘좋지’, ‘잘한다’, ‘그렇지’, ‘아먼’과 같은 예가 있다.(☞ 아니리, 발림, 추임새 항목 참조)
판소리를 지칭하는 명칭은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소리, 광대 소리, 창, 본사가(本事歌), 타령, 잡가(雜歌), 창악(唱樂), 극가(劇歌), 창극조 등이 그에 해당하며, 판소리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유래 및 역사】
판소리가 언제 성립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17세기 중․후반 무렵에 서민층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판소리의 발생 지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 판소리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판소리 연희자 상당수의 출신 지역이 호남이라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둘째, 판소리가 전국적 분포를 보이며 발생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고제를 고제로 파악하는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판소리도 처음에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면서 발생했으나, 후대에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도판 3-4)
판소리의 기원에 대한 논의도 다각도로 제기되어 있는 상황이다. 설화기원설, 문장체소설선행설, 무굿기원설, 서사무가기원설, 창우(倡優)집단의 광대소리기원설, 광대소학지희(笑謔之戱)기원설(우희영향설), 중국강창문학(講唱文學)영향설 등이 그것이다.
설화기원설은 판소리 사설의 근원이 되는 설화가 존재했고 이 근원 설화로부터 판소리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설화기원설에 따르면, 판소리는 ‘근원 설화 → 판소리 → 소설’의 도식에서 중간 단계에 위치한다. 설화를 바탕으로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옹고집타령〉 등의 판소리가 형성되고, 이것이 대본으로 정착되어 소설화에 기여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문장체소설선행설은 문장체소설이 판소리에 선행하여 판소리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학설이다. 문장체소설 선행설에 따르면, 소설과 판소리의 관계 도식에서 판소리가 후자에 위치한다. 김태준이 《조선소설사》에서 “춘향전의 고본은 옛날이야기책 모양으로 전해 오던 것을 광대들의 입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문장체소설 선행설이 본격화 되었다. 간단한 설화적 이야기가 소설로 구성되고, 이것이 희곡적 형태로 재구성된 것이 판소리라고 보는 입장이다.
무굿기원설은 굿판에서 연행되었던 무굿으로부터 판소리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신라의 화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판소리의 유래를 찾았다. 그리고 전라도 무녀가 연행하는 살풀이․축원 등 여러 굿소리의 조(調)와 너름새가 판소리 광대의 창조(唱調)와 흡사하다고 보고, 일부 비가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옛 명창들이 재인 혹은 무계(巫系)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다. 아울러 가장 대표적인 판소리 작품인 〈춘향가〉의 발생과 관련하여, 억울하게 죽은 춘향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원과 그 인근에서 치렀던 무녀의 살풀이굿이 그 기원이 된다고 밝혔다.
서사무가기원설은 호남 지역에서 연행되었던 서사무가로부터 판소리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정노식이 《조선창극사》에서 제시한 ‘무녀의 굿→광대의 창극조(唱劇調)→소설화’의 구도는 판소리의 무굿기원설은 물론 서사무가기원설과도 연관된다. 판소리의 서사무가기원설은 판소리와 서사무가 간 구연 형태상의 유사성, 시나위권이라는 특정 지역 서사무가와 판소리의 관련성 등을 근거로 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판소리와 판소리 창자의 분포 지역이 무가의 시나위권과 일치하는 점, 목 쉰 소리나 살풀이의 춤사위 등 판소리의 여러 가지 특성이 이 지역 무가의 특성과 유사한 점, 시나위권 무당 가계 출신의 판소리 창자들이 많은 점, 시나위권 무가의 살풀이적 성격이 판소리의 내용과 통하는 점 등을 들어 시나위권역 무당들의 노래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창우집단의 광대소리기원설은 고사소리, 줄소리, 선증애소리 등 창우집단의 광대소리로부터 판소리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이 기원설은 판소리가 시나위권의 서사무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판소리가 호남 지역 세습무들의 서사무가에서 나왔다는 설은 어느 정도 유력한 것이지만, 아직 서사무가가 어떻게 분화되어 오늘의 판소리를 형성시켰는가 하는 부분은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호남 지역 세습무들의 서사무가가 바로 판소리로 분화된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 존재하면서 판소리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다른 연희 양식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본 것이다. 창우집단의 광대소리기원설은 그 중간 단계를 육자배기 토리 무악권(巫樂圈) 즉 시나위권 창우집단의 고사소리, 줄소리, 선증애소리와 같은 광대소리에서 찾는다.
광대소학지희(笑謔之戱)기원설은 소학지희에서 판소리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초기 학설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광대들이 소학지희를 하며 각자의 재주를 겨루던 중에, 어떤 연희자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도 지역 무가의 음악과 양식을 사용하여, 예로부터 전승되어온 설화를 긴 노래로 엮어 부른 데서 판소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국가 재정상의 이유로 나례가 폐지되자, 생활 기반을 잃은 연희자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고도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판소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판소리의 발생에 배뱅이굿이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한편 우희(優戱)영향설도 이 학설과 맥을 같이 한다. 우희의 일종인 유희(儒戱)가 필수적으로 연행되었던 문희연에서 판소리가 중요한 연희 종목이었으며, 우희와 판소리는 골계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면에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판소리의 성립에 우희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중국 강창문학(講唱文學) 영향설은 문자 그대로 이야기[講]와 노래[唱]를 섞어서 연출하는 중국의 강창문학이 판소리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학설이다. 강창문학은 승려들이 불경(佛經)의 내용을 민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해설하기 위해 불교 사원에서 연행했던 강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강창은 공연 방식 및 연희본의 성격적 측면에서 판소리와 매우 유사하다. 한 사람이 북이나 박판(拍板)으로 스스로 박자를 맞추면서 강(講)과 창(唱)으로 고사를 이야기해 나가는 공연 방식, 강창의 대본으로부터 화본소설이 성립된 정황은 우리 판소리와 비교할 만하다. 한국에서도 소설 형태로 기록된 한문본 〈목련경(目連經)〉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광범하게 유통되었으며, 승려들이 서민 대중이나 아녀자들을 위해 〈목련경〉을 낭랑하게 읽으면서 쉽고 재미있게 해설․부연했던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 설화기원설, 문장체소설선행설, 무굿기원설, 서사무가기원설, 창우(倡優)집단의 광대소리기원설, 광대소학지희(笑謔之戱)기원설, 중국강창문학(講唱文學)영향설 항목 참조)
초기 판소리가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여러 연희 종목 가운데 하나로 연행되다가 후대로 오면서 독자적인 공연 양식으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재담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장단도 오늘날과는 달리 비교적 단출한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후대로 오면서 더늠의 축적을 통한 사설의 풍부화와 다양한 음악 어법의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온 것이 판소리사의 실상이라고 하겠다.
판소리 형성기에 활동했던 광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전라도 김제 출신의 재인 박남이 인조 4년(1626)에 거행된 나례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을 받아 왔다. 박남이 판소리를 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가 재인으로서 연행한 잡희에 판소리가 포함되었으리라는 분명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는 형편이다.
18세기 이후 판소리의 역사는 크게, 성장기(18세기), 전성기(19세기), 위축기(20세기 전반), 보존, 재생기(1960년대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⑴ 성장기(18세기)
이 시기에 이르러 판소리는 독자적인 공연예술로 정립되어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서사민요나 서사무가 등은 단순한 선율과 장단으로 이야기를 노래하는 데 비해, 판소리는 다양한 선율과 장단으로 긴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해 나간다. 판소리의 이러한 음악적, 극적 표현이 확대되는 양상은 18세기에 본격화 되었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열두 마당이 정립된 것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광대의 사회적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으며, 기량에 따른 분화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사에 자신의 활동상을 남긴 광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초기 판소리 명창으로 거론되는 하한담(河漢潭), 최선달(崔先達, 1726-1805), 우춘대(禹春大) 등이 이 시기에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 시기 판소리 관련 기록으로,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1855)나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이 호남 지역을 여행하는 중에 〈춘향가〉 공연을 보고 남긴 〈가사 춘향가 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1754) 등이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볼 때, 18세기 중엽 영조 때 판소리가 궁중에서도 연행되었으며 양반 사대부들도 서서히 판소리 향유 계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18세기는 판소리가 전문성을 갖춘 예술로 성장해 나가던 시기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판소리 향유층은 양반 좌상객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광대가 궁중에 들어가 소리하는 사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⑵ 전성기(19세기)
이 시기에는 판소리가 크게 융성했다. 판소리의 주요 작품으로 열두 마당이 모두 불리고 있었다는 점, 판소리 향유층이 확대되었다는 점, 유파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 명창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 판소리의 예술적 수준이 높아졌다는 점 등을 19세기 판소리사의 주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양반 좌상객, 중인 부호층 등이 판소리의 주요 향유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적인 면에서는 소수였으나,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판소리 향유층이 확대되면서 판소리의 미의식에도 상당한 변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진양조의 완성, 가곡성 우조의 도입 등 새로운 음악 어법의 개발 등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축적된 더늠들의 성향을 살펴보면 유장하거나 장중한 대목, 화평한 대목, 비장한 대목 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더늠들이 명창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갈고 다듬어진 것은 청중층의 변화와 일정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골계미를 자아내는 아니리, 재담 그리고 육담 등은 점차 약화되거나 축약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이후 판소리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판소리의 예술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명창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 것도 19세기 판소리사의 주요한 특징이다. 소리꾼들은 기량이나 출신에 따라 호칭이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해당 소리꾼을 폄하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재담광대나 아니리 광대, 기량이 변변치 못하여 마을 단위의 공간에서나 인정받는 소리꾼을 가리키는 또랑광대, 이에 비해 기량이 탁월하여 소리를 잘하는 명창, 왕실의 초대를 받아 소리를 했던 어전명창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본래 남성 소리꾼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에도 여성 소리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진채선(陳彩仙)이 최초의 여성 명창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안민영(安玟英)의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금향선(錦香仙)이라는 기생이 판소리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비추어 볼 때,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서서히 여성 명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성이 판소리 창자로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기생들도 판소리의 주요 향유층이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귀명창으로서 판소리에 대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공연 공간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로 외정(外庭)에서 공연하던 판소리는 양반 좌상객이 주요 청중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19세기에 들어와 방중(房中) 소리로서 실내 공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판소리 공연 공간의 변화는 판소리 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는 바, 폭넓은 음역을 가지고 소리에 힘을 주지 않아도 청중과의 교감이 비교적 용이해지면서 여성 명창이 등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리꾼의 분화와 더불어 판소리에 대한 미적 취향이 다양화되면서 유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유파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가문, 지역, 사승관계(師承關係)의 세 요소이다. 전통사회에서 판소리 창자는 무계에서 배출되었다. 무계 출신은 이른바 ‘동간네’라고 하여, 구성원간의 결속이 강하고 배타적 통혼권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 구전예술에 속하는 갈래는 거의 예외 없이 지역 유형(Oico Type)의 형태로 존재한다. 판소리의 유파는 지역을 기초로 하여 구분된다는 점에서 지역 유형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지역은 풍속과 문화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승되는 판소리에서는 사승관계도 유파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유파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송흥록(宋興祿)이 동편제 법제를 마련한 이후이며, 19세기 후반에는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을 법제로 한 서편제가 등장했다. 중고제는 정노식이 정의한 대로 경기 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로서 비동비서(非東非西)나 비교적 동편에 가까운 소리로만 이해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중고제는 지역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시대적 개념도 내포하고 있는 바, 본래는 초기 판소리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고제(古制) 소리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중고제는 동편제처럼 단일한 하나의 소리제로만 전승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계의 다양한 소리제로 전승되어 왔는데, 송흥록을 기점으로 동편제가 등장하자 중고제는 경기,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소리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즉 송흥록의 소리를 표준으로 삼는 동편제가 당시로서는 신제(新制)로서, 판소리사의 새로운 장을 연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라는 예술장르가 성립되기까지의 과정과 초기 판소리의 음악어법이나 사설 형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고제에 대한 이러한 논의 역시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중고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판소리사의 전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19세기 판소리사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전북 고창 출신의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광대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명창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이날치(李捺致, 1820-1892), 박만순(朴萬順, 1830?-1898?), 김세종(金世宗), 정창업(丁昌業, 1847-1889), 김창록(金昌祿) 등이 그의 지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특히 박만순과 김세종은 소리만 잘한 것이 아니라 신재효의 판소리 이론을 계승하여 이론과 비평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 역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랜 기간 남자소리로 유지되어 왔고 여자가 부르는 법이 없었던 당대의 판소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여성 명창을 배출한 것은 일종의 파격이었다.
신재효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을 정리했다는 점이다. 현전(現傳)하는 판소리 창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신재효가 남긴 여섯마당이 갖는 의의는 참으로 각별하다. 그는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을 정리하는 데 있어, 당대까지 불리던 사설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의 의식을 투영하여 일정하게 개작․윤색했다. 신재효의 의식세계에는 아정과 비속, 양반지향적 의식과 평민적 의식이 혼재해 있다. 그가 정리한 사설은 창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세어 적당하지 않다고 하나, 부분적으로 후대 창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러 편의 단가와 가사체 작품도 남겼는데, 이를 전적으로 신재효의 창작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당대까지 전승되고 있던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개작 내지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지은 단가 〈광대가〉에는 판소리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 담겨 있다. 〈광대가〉에는 광대라는 명칭이나 가객이라는 명칭, 시김새, 조, 장단론, 연기론 등에 관한 비교적 초기의 이론이 나와 있고,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광대가 갖추어야 조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得音), 너름새를 들었다.
요컨대, 판소리 광대를 후원하고 지도한 점, 최초로 여성 명창을 배출한 점,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을 정리한 점, 판소리 이론과 비평에 능했다는 점 등에서, 신재효는 판소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⑶ 위축기(1900-1960)
20세기에 들어와 판소리의 전승환경은 전통사회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변모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실내극장의 설립, 판소리의 창극화, 재담극․신파극 등 새로운 극양식의 등장, 여성창자의 대거 등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전승환경의 변화 속에서 판소리는 양식의 변화, 음악성의 변화 등을 체험하게 되고, 또한 여타 공연 갈래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판소리 창자들은 개별적인 활동만으로는 위기 상황을 돌파해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소리꾼들의 조직화를 꾀했는 바, 1934년 결성된 조선성악연구회가 바로 그것이다. 20세기 전반기를 이른바 근대 5명창 시대라 부른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환(金昌煥, 1855-1937), 박기홍(朴基洪), 김창룡,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유성준(劉成俊, 1873-1944)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판소리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지방에 거주하면서 판소리의 전승 보급에 힘쓴 명창도 있었다. 하동의 유성준과 이선유(李善有, 1873-1949), 김제의 전도성(全道成, 1864-?) 명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시기에 판소리 유파는 이전에 비해 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유파를 규정하는 제 요소 가운데, 사승 관계가 유파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개인의 음악 스타일을 중시하는 관점은 송만갑과 같이 당대를 대표하는 대명창의 소리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그룹을 형성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후 이런 현상은 더욱 일반화되어,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의 소리를 가리켜 ‘동초제’라고 한다거나, ‘보성소리’, 남원소리‘ 등 특정 지역의 소리를 가리키는 용례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판소리의 미적 특질에 상당한 변화가 생겨났다는 점도 이 시기 판소리사의 주요한 특질이다. 특히 범인적(凡人的) 비장이 강화되어 나타났는 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서민들은 애원 처절한 정조에 더 환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의 ‘추월만정(秋月滿庭)’,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쑥대머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와 같이 판소리에서 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의 비장은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을 직정적으로 토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양반 취향의 비장과 구별된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나, 여성 명창이 많아지면서 더욱 심화된 측면도 있다.
19세기 중반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여성 명창은 20세기에 들어와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권번(기생조합)은 여성 명창 배출의 통로로서 판소리 전승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곳에서는 당시 각 분야의 명창 명인들이 일정 기간의 교육과정을 통해 기생들에게 시조, 여창 가곡, 가사, 판소리, 가야금 등 각종 기예를 가르쳤다. 하지만 본래 일패(一牌) 기생을 위주로 조직된 기생조합에 삼패(三牌) 기생과 당골 출신이 참여하게 되면서 기생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점점 심화․고착되었고, 이후 여성 명창이 성취한 예술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기보다 기생의 범주에서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엄존하게 되었다.
실내극장이 생기고 창극이 분화되는 등 판소리의 공연환경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도 이 시기의 주요한 특징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協律社)는 왕실의 재정적 도움에 힘입어 설립되었는데, 1907년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로 지정되었다가 1908년 원각사(圓覺社)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칭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판소리는 독립적으로 연행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적인 연희 종목과 어우러져 공연되었는데, 별도로 모집된 남성 창부들이 판소리 공연을 담당했다. 기생들이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부르게 된 것은 1907년경 서울에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장안사(長安社) 등과 같은 사설극장이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사설극장의 설립이나 운영을 주도한 사람들은 상업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나 평민부호층들이며, 일본인이 자본을 투자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들은 풍속을 교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생들을 후원하고 가르쳤는데, 근대 5명창에 속하는 김창환, 송만갑, 정정렬과 같은 대명창도 여성에게 소리를 지도했다. 그중 주목할 만한 여성 명창이 이화중선이다. 이화중선은 성음이 미려(美麗)하고 거침이 없어 청중으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창극의 활성화도 여성 명창의 수가 많아지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창극 공연에 있어서 여성 배역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기 때문에 창극에서 여성 명창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남자 명창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1930-1940년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 명창으로는 박록주(朴綠珠, 1909-1979), 김여란(金如蘭, 1906-1983), 김소희(金素姬, 1917-1995), 임소향(林小香), 조농옥(曺弄玉, 1920-1971) 등을 꼽을 수 있다. 창극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창극단의 결성이 뒤를 이었다. 1936년경 임방울, 박초월(朴初月, 1917-1983), 박귀희(朴貴姬, 1921-1993) 등이 중심이 되어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을 만들었으며, 해방 후인 1946년경 김연수창극단과 조선창극단이 생겨났다.
남자 명창 못지않은 기량을 지닌 여성 명창이 많아지자, 창극 공연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들만의 조직을 모색했고, 그 결과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되었다. 박록주, 김소희, 박귀희, 임유앵(林柳鶯, 1913-1964), 임춘앵(林春鶯, 1924-1975), 김경희(金慶姬) 등 여성 단원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이 단체는 여성국극의 시초가 되는 셈이다.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한 해에 〈춘향가〉를 각색하여 올린 〈옥중화〉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듬 해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한 김아부(金亞夫) 작(作) 〈햇님 달님〉이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국극단은 설화나 야담에서 소재를 취하고 주로 애정 중심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한 때 인기를 얻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인기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여성 국극단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 명창들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으며 판소리 또한 이른바 ‘창극 소리’로의 속화(俗化)가 심화되었다. 창극에서는 성음을 통해 모든 것을 표현하려 했던 판소리의 본래적 속성 대신 연극적 요소가 보다 중요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창극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 해당하는 소리만 잘하면 되었다. 창극소리란 이와 같이 ‘토막소리화’, ‘연극화’된 소리를 말한다. 창극소리가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면서 일정한 존립 근거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대신 판소리에서 요구되는 만큼의 공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적 무게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판소리가 대중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은 주로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창극 양식의 등장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 의식을 담은 작품의 창작을 통해 판소리의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최병도라는 인물이 탐관오리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은세계〉(최병도타령)의 창작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소리꾼들을 망라한 조직인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 당대의 대명창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판소리의 부흥을 위해서는 신작 판소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전통 판소리만으로는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판소리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35년에는 새로 창작된 판소리를 중심으로 명창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박월정(朴月庭)의 〈단종애곡〉, 정정렬의 〈옥루몽〉과 〈배비장전〉, 박록주의 〈장한몽〉 등 이 시기에 불린 신작 판소리는 대부분 고전소설이나 역사적 사실에 근간을 둔 작품으로, 당대적인 시대 의식을 담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에 불린 창작판소리 가운데 시대 의식을 호흡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작창되어 불린 것으로 전해지는 〈열사가(烈士歌)〉가 있다. 〈열사가〉는 〈이준 선생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이순신전〉, 〈권율장군전〉, 〈녹두장군 전봉준전〉 등이 덧붙기도 한다.
⑷ 보존․재생기(1960- 현재)
196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전통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기 시작했다. 1962년에 문화재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방안의 하나로 문화재보호법을 제정․공포하여 무형문화재 제도를 시행한 것은, 전통문화예술의 안정적 전승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판소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판소리 전승에 끼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오늘날 판소리가 어느 정도의 자생적 전승력을 갖추게 될 수 있게 된 것에는 이 제도가 기여한 바가 상당히 크다.
1964년에 김연수, 박록주, 김소희, 김여란, 정광수(丁珖秀, 1909-2003), 박초월이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1970년에는 정권진(鄭權鎭, 1927-1986)의 〈심청가〉, 1973년에는 박록주의 〈흥보가〉, 박동진(朴東鎭, 1916-2003)의 〈적벽가〉, 박봉술(朴鳳述, 1922-1989)의 〈적벽가〉, 1974년에는 정광수의 〈수궁가〉, 박초월의 〈수궁가〉, 1976년에는 한승호(韓承鎬, 1924-2010)의 〈적벽가〉, 1988년에는 강도근(姜道根, 1918-1996)의 〈흥보가〉, 1991년에는 오정숙(吳貞淑, 1935-2008)의 〈춘향가〉, 성창순(成昌順, 1934- )의 〈심청가〉, 조상현(趙相賢, 1939- )의 〈심청가〉, 2002년에는 성우향(成又香, 1935- )의 〈춘향가〉, 박송희(朴松熙, 1927- )의 〈흥보가〉, 한농선(韓弄仙, 1934-2002)의 〈흥보가〉, 송순섭(宋順燮, 1939- )의 〈적벽가〉, 2012년에는 남해성(南海星, 1935- )의 〈수궁가〉, 2013년에는 신영희(申英姬, 1942- )의 〈춘향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법은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에 판소리에 통합되었다. 그동안 1987년에 김명환(金命煥, 1913-1989), 1985년에 김득수(金得洙, 1917-1990), 1991년에 김성권(金成權, 1929-2008), 1996년에 정철호(鄭哲鎬, 1923- ), 2013년에 김청만(金淸滿, 1946- )이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판소리의 무형문화재 지정과 관련한 공통된 배경은 판소리는 보존할만한 작품적 가치를 지닌 민족의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전통문화예술과 마찬가지로 전승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대가 명창의 소리를 잇고 있는 당대의 소리꾼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연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존을 서두르지 않을 경우 인멸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판소리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도제식 학습과정을 거쳐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스승과 똑같은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니다. 각 명창은 스승의 소리를 그대로 잇는 것이 아니라 자기화, 개성화 과정을 거쳐 자기만의 독자적인 소리세계를 지닌 개체적 존재였다.
판소리는 처음에 ‘더늠’ 중심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이후에 ‘바디’ 중심 체제로 바뀌었다. 〈춘향가〉가 가장 먼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여러 명창의 더늠을 모아 교합본을 만들고 각 명창의 더늠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그 이전의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세기 전반에 판소리의 무대 공연은 대개 ‘토막소리’(부분창)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의 방식은, 1968년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 공연을 기점으로 확대된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한 1964년 무렵만 해도 여전히 ‘토막소리’(부분창)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공연방식이었으며, 더늠 중심으로 무형문화재를 지정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관습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러던 것이 1967년 이후 특정 명창의 특정 바디 전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유파 혹은 법제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판소리사의 주요한 특징이다. 법통 있는 소리일수록 보존할만한 가치가 크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 지정된 바디에도 법제가 명시되었다. 판소리 〈적벽가〉를 지정할 때, “박봉술-송만갑 〈적벽가〉 후계자, 박동진-조학진(曺學珍, 1877-1951) 〈적벽가〉 후계자, 한승호 - 김채만(金采萬, 1865-1911)〈적벽가〉 후계자”라고 밝힌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전통문화예술의 보존과 전승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판소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지원에 힘입어 판소리가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확보하게 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자를 길러 소리의 법통을 잇게 한 전수자 제도가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요한 제도적 장치이다.
그러나 법통과 유파를 중시하는 관점이 강화되어 가면서, 판소리의 역동성과 현장성은 약화되고 대신 양식화, 정형화가 심화되어가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사진소리’, ‘박음소리’, ‘오뉴월 듣던 소리 구시월에 또 듣는다’ 등의 말이 생겨난 것도 소리꾼의 창의적 변용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줄어들고 배운 대로만 소리하려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완창이 명창의 기량을 가늠하는 유력한 공연 방식으로 정립된 것도 유파가 중시되는 이러한 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완창의 전범을 마련한 이는 박동진 명창이다. 박동진은 1968년 〈흥보가〉를 시작으로 하여, 1969년 〈춘향가〉, 1970년 〈심청가〉, 1971년 〈적벽가〉, 1972년 〈수궁가〉를 완창했다. 당시 박동진 명창은 일련의 완창 공연을 함으로써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1973년 〈적벽가〉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실전(失傳)판소리의 복원과 창작판소리 작업이 지속된 현상에 주목할 때, 이 시기는 판소리의 재생기이기도 하다. 1960-1970년대, 창작판소리 분야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낸 이는 박동진 명창이다. 박동진은 1969년 〈판소리 예수전〉을, 1973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전〉을 불렀다. 실전된 7마당 중 〈변강쇠타령〉, 〈배비장전〉, 〈옹고집타령〉, 〈장끼타령〉, 〈숙영낭자전〉 등 실전된 작품에 곡을 붙여 부르기도 했는데, 비록 역사성을 담보한 작창이라 할 수는 없지만 창이 전하지 않는 일련의 작품을 판소리로 부름으로써 이른바 ‘복원판소리’의 활성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임진택이 보여준 창작판소리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85년에 〈똥바다〉를 발표했으며, 〈오적〉과 〈소리내력〉도 판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1990년에는 기존의 사설에 곡을 붙이는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한 〈오월 광주〉를 발표했다. 임진택이 부른 일련의 창작판소리는 민중적 시각에 입각한 작품들로, 주로 사회의 변혁운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이나 지식인층 그리고 의식 있는 시민층에 의해 향유되어 왔다. 이외에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김명곤의 〈금수궁가〉, 은희진(殷熙珍, 1947-2000)․안숙선(安淑善, 1949- )․박금희․김수연(金秀姸, 1948- )․김성애 등의 〈그날이여 영원하라〉, 윤진철의 〈김대건전〉 및 〈무등진혼가(無等鎭魂歌)〉 등이 있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 창작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쩍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아마도 판소리의 존립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인사동 거리소리판’, ‘소리여세’, ‘또랑깡대 컨테스트’, ‘바닥소리’, ‘타루’, 창작판소리사습대회 등 여러 조직 혹은 소리판을 통해 다수의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새롭게 소개되고 있는 창작판소리의 수가 많아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작품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적인 작업들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청중과의 교감을 중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매우 소중하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예술성을 담보한 판소리가 출현했을 때, 21세기 판소리사는 새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내용 및 특성】
판소리의 ‘판’은 판소리가 연행되는 공간이나 한 바탕의 판소리 작품, 또는 판소리 연행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첫째, ‘노름판’, ‘씨름판’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이 모여 특수한 행위를 벌이는 장소’를 지칭하는 ‘판’은 판소리에서 다수의 청중을 앞에 두고 창자와 고수가 판소리를 연행하는 공간, 즉 소리판을 뜻한다. 맥락에 따라 장소적 공간은 물론 그 소리판의 분위기나 판소리의 연희 행위 자체를 가리켜 판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용례라 할 수 있다. 둘째, ‘노름 두 판’, ‘씨름 한 판’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떤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완전한 과정’을 지칭하는 ‘판’은 판소리에서 판소리 한 바탕을 의미한다. 이때의 판은 처음과 끝이 온전한 판소리 한 바탕을 가리키는 것으로, 도막소리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셋째, ‘판놀음’, ‘판굿’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문인들이 벌이는 놀이나 행위’를 지칭하는 ‘판’은 판소리에서 고정된 틀을 의미한다. ‘판에 박히다’라는 관용구의 의미를 부각시켜, ‘판에 박힌 듯이 정해 놓고 부르는 소리’라는 특성을 판소리에 부여하기도 한다. 넷째, 악조를 의미하는 판(板)으로도 해석된다. 이때의 판소리는 ‘일정한 장단을 가진 악조로 부르는 소리’로 풀이된다.
19세기 전반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戱)〉에 판소리 열두 마당으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흥보가)〉, 〈토끼타령(수궁가)〉, 〈화용도(적벽가)〉, 〈배비장전〉, 〈옹고집전〉,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왈자타령〉, 〈가짜신선타령〉, 〈강릉매화전〉이 소개되어 있다. 1940년에 간행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가짜신선타령〉 대신 〈숙영낭자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춘향가〉는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남원 광한루에서 만난 기생 월매의 딸 춘향과 사또 자제 이몽룡이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지만, 이도령은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남겨진 춘향은 새로 부임한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다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도령이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애정은 신분 갈등의 문제와 연계되어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현전하는 판소리 중 가장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심청가〉는 자기 희생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슬픈 대목이 특히 많지만 작품의 후반부에는 골계․해학적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다. 효녀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할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기 위해 남경 선인들에게 몸을 판다. 인당수 제수가 되어 물에 뛰어 들었지만, 옥황상제의 명으로 세상에 다시 나와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내용이다.
〈흥보가〉는 물질적 가치와 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물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가는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가난하지만 착한 아우 흥보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 주어 박씨를 얻고, 그 박을 타서 부자가 된다. 부유하지만 심술궂은 형 놀보도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박씨를 얻지만, 그 박으로 인해 망하게 된다. 그러나 동생 흥보의 우애로 놀보는 개과천선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
〈수궁가〉는 지혜의 문제를 다룬 우화적인 작품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결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별주부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고자 세상에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토끼를 속여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토끼는 기지를 발휘하여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적벽가〉는 나관중이 지은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된 작품으로, 전통사회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남성 영웅들의 쟁패를 다룬 〈적벽가〉는 공력을 들여 소리해야 제맛이 나는 어렵고 진중한 소리로, 양반층의 취향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또 군사 개개인의 형상을 생생하게 구현해 냄으로써 조선후기 서민층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이들 다섯 작품은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주인공이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점, 골계와 비장이 적절하게 교직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변강쇠타령〉에는 조선후기 유랑민들의 비극적인 생활상이 골계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도의 음남(淫男) 변강쇠와 황해도의 음녀(淫女) 옹녀가 우연히 만나 지리산에 들어가 함께 살던 중, 변강쇠가 장승을 패어 때고 동티가 나서 죽게 된다. 그런데 이를 치우려던 사람들까지 다 그의 시체에 붙거나 죽었고, 결국 뎁득이가 치상을 하고 떠난다는 내용이다. 성(性)과 죽음을 노골적으로 다룬 독특한 작품이다.
〈장끼타령〉은 유랑하는 가장으로서의 장끼의 비극적인 삶과 까투리의 개가가 가지는 현실적인 의미를 다룬 우화적인 작품이다. 배고픈 장끼가 부인 까투리의 만류를 무시하고 콩을 먹다 덫에 걸려 죽는다. 이후 까투리는 여러 새들의 청혼을 받지만, 문상 왔던 홀아비 장끼와 재혼한다는 내용이다.
〈배비장타령〉은 공허하고 위선적인 유가윤리를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평소 도덕군자를 자처하며 주색을 멀리하고 도도하게 지내던 배비장이 상관인 제주목사를 따라 제주에 부임한다. 그러나 배비장은 제주목사의 명을 받은 기생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빠져 궤 속에 든 채 관아에 끌려가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옹고집타령〉은 옹고집이라는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인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옹고집은 욕심 많고 심술궂으며, 불도(佛道)를 멸시하여 동냥온 중에게 행패를 부린다. 그러다 중이 신통력을 주입한 가짜 옹고집의 출현으로 제 집에서 쫓겨나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개과천선하여 다시 집에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강릉매화타령〉은 지방관아를 배경으로 하며, 지방수령에 관련된 인물이 여색으로 인해 골계적인 사건을 겪는다는 점에서 〈배비장타령〉과 유사하다. 강릉부사의 책방(冊房) 골생원이 기생 매화를 만나 즐겁게 지내던 중 서울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는다. 서울에 온 골생원이 과거 시험 답안에 매화를 그리워하는 시를 써내고 낙방하여 강릉으로 돌아오자, 강릉부사는 매화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황혼 무렵 강릉부사의 명에 따라 귀신인 체 하고 골생원을 만난 매화는 그를 벌거벗겨 경포대로 유인한다. 골생원은 매화와 함께 자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사또에 의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무숙이타령〉의 주인공 김무숙은 서울 상인층으로 추정되는 왈자로, 18세기 이래 서울의 도시적 유흥 속에서 형성된 전형적인 탕아이다. 온갖 놀음과 청루 출입으로 세월을 보내던 김무숙은 기생 의양을 보고 첫눈에 반해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허랑방탕한 생활을 계속하자 보다 못한 의양이 무숙의 본처, 노복 막덕이, 대전별감 김철갑, 다방골 김선달, 평양 경주인 등과 공모하여 그를 개과천선케 한다는 내용이다.
〈가짜신선타령〉은 사설이나 소리가 전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관우희〉 및 안서우(安瑞羽)의 〈금강탄유록(金剛誕游錄)〉을 참조하여 보면, 자기도 신선이 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지닌 광풍이 금강산에 들어가 노승에게 그 방법을 묻고자 했으나, 그의 허황됨을 눈치챈 인물들이 가짜 신선을 등장시켜 그를 속이는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에는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고, 실재하지 않고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선계라는 대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비정상적인 인물의 허황성에 대한 풍자가 나타나 있다.
이들 실전 7가에 나타난 공통점으로, 주인공이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점, 세태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 골계 위주로 되어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주인공들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성격은 뒤틀림과 경직성의 두 종류로 대별되는데,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등 경직된 인물을 풍자한 작품일수록 골계미 일변도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며, 〈변강쇠타령〉, 〈장끼타령〉처럼 뒤틀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은 골계미 외에 기괴미나 비장미를 구현하고 있다. (☞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숙영낭자전 항목 참조)
판소리의 미의식은 사설 내용, 성음, 장단과 조 그리고 너름새의 결합을 통해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사설은 미의식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차적 중요성을 가진다. 재담이나 육담, 욕설, 패러디 등은 판소리에서 골계미를 자아내는 주요 기제이다. 골계는 해학과 풍자로 나뉘는데, 해학은 지체가 높은 인물이나 낮은 인물이 웃음거리가 되는 데서 두루 나타나지만 풍자는 주로 지체 높은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속화하고 조롱하는 데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비장미는 긍정적 인물이 고난을 당하거나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서 잘 드러나며, 장중미는 긍정적 인물의 위풍당당하고 영웅적인 면모를 그리는 데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비장미나 장중미는 사설의 내용이 음악적 기능을 동반할 때 더욱 실감나게 표현된다.
판소리의 주요 미적 특질은 골계와 비장이다. 그렇지만 골계미와 비장미가 순일하게 표출되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골계미를 연출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비장의 효과를 자아내거나, 비극적 정황인데도 상황을 골계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비장적 골계’ 혹은 ‘골계적 비장’으로 부를 수 있다.
판소리에는 비장과 골계의 범주만으로 포섭할 수 없는 미의식도 확인된다. 가령, 별주부가 수궁에서 육지로 나와 세상 구경을 하는 ‘고고천변(皐皐天邊)’ 대목은 평우조(平羽調)로 매우 화평한 분위기로 불린다. 이런 대목은 골계나 비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아미에 가깝다. ‘적성가’(진양+우평조), ‘백백홍홍’(중머리+우평조), ‘자진 사랑가’(중중머리+계면조), ‘기산영수’(중중머리+우평조), ‘범피중류’(진양+우조) 등 판소리에서 우아미를 자아내는 대목은 적지 않은 편이다. 이런 대목들은 대개 한문 고사 성어를 위주로 하여 사설이 짜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열두 마당이 판소리의 주요 작품으로 정립된 시점에서 판소리는 골계미가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실전 7가의 내용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골계미 위주로 짜인 작품은 전승이 약화되는 반면, 비장과 골계가 적절하게 교직(交織)되어 있고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은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양상을 보인다.
판소리는 일차적으로 이야기에 해당하는 사설과 장단(長短)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연희이다. 장단은 박자와 속도, 강약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는 일종의 리듬형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에 있어 장단은 판소리의 골격(骨格)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법(鼓法) 즉 소리북의 주법(奏法)으로 구체화된다. 판소리장단은 진양조장단, 중모리장단, 중중모리장단, 엇중모리장단, 자진모리장단, 휘모리장단, 엇모리장단의 일곱 장단을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장단에 사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문제는 판소리의 예술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이 되며, 판소리창자들도 이 점을 인식해 교대죽, 대마디대장단, 엇부침, 완자걸이, 잉애걸이 등 다양한 붙임새의 기교를 개발했다.
지금까지도 판소리창자들 사이에서는 “판소리는 성음놀음이다”, “성음이 아니면 소리가 아니다”라는 다소 극단적인 말이 널리 통용된다. 명창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른바 ‘소리/목을 얻는’ 과정에 해당하는 득음이 필수적인 요건인 것이다. 이른바 ‘사기(四忌)’로 총칭되는 노랑목, 함성(含聲), 전성(顫聲), 비성(鼻聲)은 판소리에서 대체로 기피하는 성음이며, 이상적인 성음으로는 천구성과 수리성이 주로 꼽힌다.
한편 국악에서 시김새는 역동성과 시간성을 가지고 음색과 음질을 변화시켜 가면서, 그 음악만의 독특한 맛을 결정짓게 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의 시김새도 같은 의의를 가진다. 곧게 펴나가고, 굵게 떨고, 흘러내리고, 치켜 구르고 하는 시김새를 통해 판소리의 오묘한 맛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창자들은 감는 목, 군목, 덜미성, 방울목, 속목, 아귀성, 웨장목 등의 시김새를 활용해 소리의 멋과 맛을 살린다.
【역대 명 연희자】
판소리의 발생기에 해당하는 18세기 말까지의 관련 기록에는 명성이 높았던 명창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 1810년경의 《관우희》에는 우춘대, 소년명창 권삼득(權三得, 1771-1841), 모흥갑(牟興甲)이 언급되어 있으며, 1824년경의 《갑신완문(甲申完文)》에는 당시 광대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로 추정되는 하은담(하한담)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19세기 전반기는 이른바 ‘전기 8명창시대’라고 불린다.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廉季達), 모흥갑, 고수관(高壽寬, 1764-?), 신만엽(申萬葉), 김제철(金齊哲), 박유전, 황해천(黃海天), 주덕기(朱德基), 송광록(宋光祿), 김성옥(金成玉, 1801-1834), 방만춘(方萬春) 등이 이 시기의 이름난 명창들인데, 흔히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의 7명에 송광록, 주덕기, 황해천 중 한 명을 더 꼽아 팔명창이라 한다. 비가비광대로 활동했던 권삼득은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다가 갑자기 툭 떨어지는 덜렁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던 송흥록은 김성옥이 창시한 진양조를 완성하고, 메나리조와 설움조, 호령조를 판소리에 가미하는 한편 동편제 소리의 근간을 이루었다. 염계달은 김성옥과 함께 중고제의 시조로 꼽히는 인물로 경드름과 추천목을 창시했다. 〈평양도〉의 판소리 장면에 그려진 인물로도 유명한 모흥갑은 임금에게 벼슬을 제수 받은 최초의 어전(御前) 광대로 알려져 있다. 고수관은 좋은 목과 문장력을 갖추었던 명창으로, 그의 장기였던 〈춘향가〉의 ‘자진 사랑가’는 오늘날에도 ‘고수관제’로 전승되고 있다. 신만엽과 김제철은 온화하고 명랑한 석화제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데, 각각 〈수궁가〉와 〈심청가〉를 특히 잘 불렀다고 한다.
19세기 후반기는 ‘후기 8명창시대’라고 일컬어지는데,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송우룡(宋雨龍, 1835-1897), 정창업(丁昌業, 1849-1919), 정춘풍(鄭春風), 김창록, 장자백(張子伯, ?-1907), 김찬업(金贊業), 이창윤(李昌允), 김정근(金定根), 한송학(韓松鶴)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박만순은 고상하고 점잖은 소리로 주로 식자(識者)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날치는 쉬운 사설과 탁월한 수리성을 장기로 특정한 계층과 관계없이 두루 인기를 얻었다. 송우룡은 송문(宋門)의 동편 소리를 계승한 명창으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신재효의 문하에서 이론적 틀을 겸비한 김세종은 송문(宋門)일가와 구별되는 동편 소리의 한 축을 형성했다. 유성준, 이화중선, 김정문, 강도근 등 근대 이후의 명창들과 연고가 있었던 장자백은 남원 판소리의 맥을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정창업은 완숙한 계면 창법을 구사했던 명창으로 박유전으로부터 이어진 서편 소리를 전승한 인물이다. 정춘풍은 “남(전라도)에는 신재효, 북(충청도)에는 정춘풍”이라는 말이 전할 만큼 이론에 박식했던 비가비광대이다. 김찬업의 대표적인 더늠은 〈수궁가〉 중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이며,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아는 소리꾼으로 통했다고 한다. 김정근은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중고제 소리를 전승했던 김성옥 가문의 법통을 이은 소리꾼이다.
19세기 말부터 1930년까지는 ‘근대 5명창시대’로 일컫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명창으로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유성준, 전도성, 박기홍, 김채만, 이선유 등이 있다. 김창환은 서편제 법통을 이은 명창으로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의 주석을 지냈다. 송만갑은 송문(宋門)의 마지막 계승자로, 협률사 활동 및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창극 공연 활성화 등의 업적을 남긴 대명창이다. 송만갑과 함께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이동백은 빼어난 풍채와 타고난 천구성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독창적이고 즉흥적인 소리로도 유명했다. 김창룡은 중고제 명창 가문에서 태어나 그 법통을 이었으며, 명반으로 꼽히는 〈심청전〉, 〈적벽가〉의 창극 음반도 남겼다. 정정렬은 창극의 전형을 마련하고 〈춘향가〉를 자신의 제로 새롭게 정립한 명창으로 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성준은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명창으로 당대에도 독보적이었던 그의 〈수궁가〉 오늘날까지 올곧게 계승되고 있다. (☞ 전기 팔명창, 후기 팔명창, 근대 오명창 및 개인 창자별 항목 참조)
1964년 이후 현재까지 김연수(춘향가), 정광수(수궁가), 김소희(춘향가), 김여란(춘향가), 박초월(수궁가), 박록주(흥보가), 정권진(심청가), 박동진(적벽가), 박봉술(적벽가), 한승호(적벽가), 강도근(흥보가), 오정숙(춘향가), 성창순(심청가), 조상현(심청가), 박송희(흥보가), 성우향(춘향가), 송순섭(적벽가), 남해성(수궁가), 신영희(춘향가) 등이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는 김득수, 김명환, 김성권, 정철호, 김청만이 인정되었다.
김연수는 판소리 동초제(東超制)의 법제를 마련한 인물이자 창극계의 거목으로 현대 국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정광수는 명창 정창업의 손자로, ‘동편제의 거봉’, ‘선비 명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가들의 소리를 이어 만정제(晩汀制)를 확립한 김소희는 우리 국악 발전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해외 공연을 통해 우리 소리를 널리 알렸다. 김여란은 《조선창극사》에 이름을 올린 여성 명창으로 정정렬의 〈춘향가〉를 가장 정통으로 계승한 명창으로 평가받았다. 박초월은 타고난 성음으로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박귀희와 함께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의 전신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박록주는 근대 대명창들의 소리를 사사한 대표적인 여성 명창으로, 1964년 〈춘향가〉의 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1970년에 〈흥보가〉의 보유자로 재인정되었다. 정권진은 정재근(鄭在根)-정응민(鄭應珉, 1896-1963)으로 이어지는 소리 명문인 정문(鄭門)의 후손으로 보성소리의 법통을 계승했다. 박동진(朴東鎭, 1916-2003)은 〈흥보가〉의 완창 발표로 현대 판소리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전승이 끊긴 판소리의 복원 및 창작판소리 발표에도 힘을 기울인 명창이다. 박봉술은 성음의 위기를 각고의 독공으로 극복한 인물로 송만갑제에 가장 정통한 동편제의 명창이라 불렸다. 한승호는 가야금과 판소리의 명인이었던 한성태의 아들이다. 극적이고 즉흥적이면서도 어려운 기교가 많은 그의 소리는 귀한 소리제로 평가된다. 강도근은 수리성에 철성을 겸한 성음을 지녔으며, 동편제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는 한편 남원 판소리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오정숙은 김연수의 동초제를 계승한 명창으로 여성 가운데는 최초로 판소리 다섯바탕을 완창했다.
김득수는 진도 출신의 명고수로 한때 창자로도 활동했으며, 판소리 고법 뿐만 아니라 장고에도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김명환은 치열하게 고법을 연마하여 이론에도 해박했던 명고수로, 1981년에는 그의 호를 딴 일산회(一山會)가 결성되었다.
【다른 지역 사례】
판소리의 주요한 공연예술적 특징으로, 말과 노래의 교직, 단출한 무대 구성, 전문 예술인에 의한 연행, 부채라는 소도구의 사용, 북이라는 반주 악기의 사용과 특유의 장단 및 주법, 몸짓을 비롯한 연기(演技)의 활용, 비교적 장편에 해당하는 서사적 이야기를 대상으로 한 작품 구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국내외의 유사 장르와 판소리가 공유하는 특징으로 논의되어 온 점이기도 하다. 특히 다수의 청중 앞에서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말과 노래를 섞어가며 서사적인 이야기를 연출한다는 특징은 경기 지역의 〈장대장타령〉, 서도 지역의 〈배뱅이굿〉과 〈변강쇠타령〉 등 서사성 짙은 재담소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장대장타령〉은 박춘재가 해주의 ‘장대장네굿’을 모티프로 하여 짠 재담소리로, 한량으로 지내던 장대장이 만포첨사로 부임하여 무당 출신의 아내를 얻으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에는 말로 하는 재담 외에 민요, 잡가, 무가, 노랫가락 등이 다양하게 삽입되어 있다.
서도 지역의 〈배뱅이굿〉은 서도 명창 김관준(金寬俊)이 그의 아들 김종조를 비롯한 곽풍, 최순경, 김칠성 등에게 전수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1인 입창의 장고 반주로 공연되는 〈배뱅이굿〉은 판소리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신축적이고 유동적이며 연극적인 동작과 표현이 강조되는 점이 특징이다. 이본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소리풀이-산천기도-배뱅이 출생 및 성장-상좌중과 사랑-배뱅이의 죽음-배뱅이의 장례-팔도무당굿-박수무당 내력-박수무당 굿-귀향’의 대목 구성이 일반적이며, 몇 가지 독립된 이야기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이룬 형태이다. 같은 지역의 〈변강쇠타령〉은 판소리 사설 〈변강쇠타령〉과 대비하여 볼 때, 강쇠가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까지의 내용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심술타령’, ‘나무타령’, ‘사랑가’, ‘독경소리’, ‘회심곡’ 등 기존의 소리를 차용한 대목이 많다. 이들 재담소리는 반주에 얹어 구송하는 말과 노래로 서사적인 이야기를 엮어간다는 큰 틀에서 판소리와 유사하나, 화소 간의 결속력이 약하고 기존 가요의 단순한 삽입 및 즉흥 연행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접 국가 사례】
판소리는 북 반주에 따라 아니리와 창을 섞어가며 비교적 장편의 서사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강창예술(講唱藝術) 혹은 구비연행서사시(口碑演行敍事詩)에 해당하는 중국의 대고(大鼓)․탄사(彈詞), 일본의 조루리(淨瑠璃)․강담(講談), 몽골의 벤스니 울게르 등과의 비교가 가능하다.
중국 강창예술의 기원은 불교적인 색채의 서사를 이야기와 노래로 엮어 나아가는 당대(唐代)의 변문(變文)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를 보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로 변화시킨 좁은 의미에서의 강창(講唱) 양식이 성립되었고, 다시 고자사(鼓子詞)로 변화되었다. 이후 원대(元代)의 제궁조(諸宮調)를 거쳐 명대(明代)에 와서는 북부지방의 고사(鼓詞)와 남부지방의 탄사(彈詞)로 나누어져 각기 발전했다. 고사(鼓詞)는 북 반주에 맞추어 연행되며, 사설과 창이 교차되는 중장편 위주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판소리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고사(鼓詞)의 일종으로 현전하는 대고서(大鼓書)는 창만 있고 사설은 없는 단순한 체제이다. 중국의 강창 양식에서는 무대에서 창을 하는 사람이 직접 판고(板鼓)를 치는 것이 보편적이며, 이때 북채는 북을 치는 데에도 쓰지만 각종 병기(兵器)나 도구 흉내를 낼 때 사용하기도 하고, 간단한 몸짓 연기와 함께 중요한 동작을 보조하기도 한다. 또 요즘의 주요 반주 악기는 악사가 연주하는 비파, 월금(月琴), 삼현(三絃), 이호(二湖) 등의 현악기로, 초기 형태와 달리 북 반주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창도예능(唱導藝能) 즉 강창문화 역시 불교의 포교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발전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역사적․학문적 양식인 표백체창도(表白體唱導)와 일본 토착의 통속적․설교적인 구두체창도(口頭體唱導)의 두 계통으로 전승되었다. 이후 이 분야에도 직업적인 연행자가 나타나 불교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세태도 담아내기 시작했으며, 이후 조루리, 강담 등의 형태로 변모되었다. 조루리는 한 명의 창자가 부채로 박자를 맞추며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고토바[詞], 이로[色], 지[地]로 엮어나가는 극적인 장르이다. ‘고토바’는 일상적인 대화에 가까운 이야기 전개로 판소리의 아니리에 상응하며, ‘지’는 비교적 선율성이 강한 공연 부분으로 판소리의 ‘창’에, ‘이로’는 그 중간에 속하는 부분으로 판소리의 ‘도섭’에 해당한다. 여기에 샤미센[三味線] 반주가 결합된 것이 판소리와 유사한 형태인 기다유부시[義太夫節]인데, 극작술과 인형의 합류 이후에는 인형극 양식인 분라쿠[文樂]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구전심수로 전해진 판소리에는 작곡자나 악보가 전하지 않지만, 기다유부시의 작품은 작곡자와 작곡연도가 명확하게 전한다. 처음부터 기록체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승되어온 기다유부시는 판소리에 비해 가변성이 거의 없는, 고정성이 매우 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벤스니 울게르는 17-18세기 초, 청대 중국 동북지역의 몽골족 사이에서 발생한 장르로 주요 연창자는 남성이었다. 판소리의 독공과 비슷하게 시문을 익히고 발음을 연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연창자가 직접 악기 두르벤치 호르를 연주하며 문학, 음악, 연희연출을 모두 담당하는 1인 연창 방식으로 공연되는데, 이것은 판소리의 창자-고수 2인 체제와 차이가 있다. 또 벤스니 울게르는 순수 몽골의 설화와 기록문학, 한역된 중국 역사문학과 소설, 몽골화된 고사 등 300여종의 작품이 전승되고 있어 판소리에 비해 그 양이 방대하다. 한편 사제전승․가계전승을 통한 구전심수(口傳心授)와 즉흥창작(卽興創作)의 전통은 판소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의의】
판소리는 17세기 후반 무렵 서민층을 기반으로 한 민속예술에서 출발하여,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양반․중인․부호층까지 주요 향유층으로 아우르며 전 계층적인 애호를 받는 민족예술로 성장했다. 당대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일상의 삶을 반영한 새로운 사설의 첨가, 다양한 음악어법의 수용 및 개발을 통한 음악적 표현 능력의 확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판소리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수준 높은 예술로 변모되었고, 다양한 계층을 향유층으로 견인해 낼 수 있는 흡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판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공연예술이다. 여기에는 다채로운 인간 경험과 사상,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소리꾼은 소리판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발휘하여 청중에게 일정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창-아니리의 교체, 비장-골계의 교직을 통한 긴장-이완 즉 맺고 풀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가운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다. 판소리는 기쁨과 슬픔 뿐만 아니라 장중함, 화평함, 유유함도 맛보게 해 준다. 다채로운 감정의 촉발을 경험하게 하여 예술적 감흥을 맛보게 하는 것이 판소리의 본질이다.
【사진 및 도판】
도판 1. 〈여흥 민씨(驪興閔氏) 회혼례도(回婚禮圖)〉(홍익대 박물관 소장)에 보이는 판소리 연희 장면.
도판 2. 〈평양감사 환영연도(일명 평양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에 보이는 판소리 연희 장면.
도판 3.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독일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소장)에 실린 〈가객 소리하고〉에 보이는 판소리 연희 장면.
도판 4.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독일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 소장)에 실린 〈소리하는 모양〉에 보이는 판소리 연희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