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43년(중종38)∼1617년(광해군9) = 75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영천(榮川)이다. 장악원(掌樂院)주부(主簿) 권유년(權有年)의 아들이고, 박은(朴訔)의 후손인 박해(朴海)의 사위이다.
[선조 초기 활동]
1572년(선조5)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보임되었다가 교검(校檢) ·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는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선조19)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임진왜란 때 활동]
1592년(선조25) 평창군수(平昌郡守)로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는데, 평창 동촌(東村)의 동굴에 목책을 치고 왜적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끌려 다니면서 왜적의 정세를 탐지해서 『호구일록(虎口日錄)』을 작성하여 몰래 관군에게 알렸다. 원주(原州)의 누각(樓閣)에 갇혀 있다가 아들 권주(權*)와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3년(선조26)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알현(謁見)하니,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는데, 환도(還都)하여 군자감(軍資監)첨정(僉正)으로 임명되었다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나갔다.
[선조 후기 활동]
1602년(선조35) 사섬시(司贍寺)정(正)이 되었다가, 간성군수(杆城郡守)로 나갔으며,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내자시(內資寺) 정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로 승진하였다. 그때 마침 휘하의 봉인(奉引)이 잘못을 저지르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歸鄕)하였다. 고향 영천(榮川)에서 은거한 지 13년 만인 1617년(광해군9)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5세였다. 저서로는 『남천유고(南川遺稿)』가 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영천(榮川) 방현(方峴)에 있으며, 친구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동주집(東州集)』 문집 권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