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三
詩
謹次貞武公崔先生-賜祭時韻, 贈參議李公-夢星-立石韻, 止淵精舍文會時唱酬, 花溪書社文會時拈集中韻, 和崔子成, 龜山書院唱酬, 龍潭唱酬, 午憩龍潭更宿濟樂堂, 追次花溪柳公-宜健-立石韻, 追次孫丈-弘九-回婚慶席韻, 題求忠堂李公-義立-遺事後, 壬午立春設文會于汶亭, 癸未除夕, 汶亭會踵成故事-乙酉, 病中謾詠二首, 盛會達城館拈一聯與金塘李士謙-此聯與樂齋唱酬忠州丹月詠皆少時作而收拾於故紙堆中, 覆試後臨別拈韻, 過忠州丹月偶吟-甲辰, 重過有感-丙午, 骨窟吟, 書堂講會吟, 詠雪, 苦雨, 索繩吟, 丁丑春漢寶以岳院長席行到中路適憂銜橛仍留府邸調治未卽躬診替走小詩-幷序, 佛寺懷古, 山寺重陽月待友人書懷, 龍川洞議創書社, 次崔上舍翊之-祈永-臥龍庵韻, 與南鳴應崔翊之攜酒遊月城拈雷字求和, 次崔進士-鵬遠-龍岡韻, 南草吟-排律六十一韻, 挽再從弟正字九甫-鼎牧, 挽南上舍-丈萬, 挽族兄大憲公-鼎揆-二首, 挽族兄參議公-鼎德, 挽南上舍戚丈-景采-二首, 挽癡庵南戚兄三絶, 挽族兄-鼎采, 挽蔣士顯-錫民, 挽崔而輔, 挽李學叟-運賢, 挽族兄耕道-鼎任, 挽宗君修撰善長, 挽申祖謙三絶, 挽孫明汝-致東-二首, 挽崔景至, 挽舍弟鼎健, 挽孫丈-弘九, 挽金丈-輝祖-悅卿, 挽族弟漢寶, 挽族姪伯心-觀祥, 挽族弟-鼎濟, 挽崔聖執-思健, 挽族姪次野, 挽族弟亨叔, 挽忍窩李丈, 挽懼庵李丈, 挽任持國, 挽任仲若, 挽尹龍見, 挽張孺伯三絶, 挽蔣先予-逸民, 挽崔質庵仲韞-璧, 挽朴文一, 挽韓德能, 挽鄭-光復, 挽洪-宇龍, 挽李-震煥, 石假山聯句-幷序, 玉成樓迎春會聯句, 贈平凉子軸中歸字韻-幷序
歌
龜巖亭山水歌 (27)
귀암정을 둘러싼 풍경과 함께 감흥을 읊은 歌이다. 모두 15수로 되어있다.
書
與金方伯-魯應-壬申 (28)
1812. 경상도 관찰사인 金魯應(1757∼?)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부임을 축하하며 시를 지어보내는 뜻을 전하고 있다.
與李聖應 (28)
族兄인 李鼎濟(1755∼1817)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聖應은 이정제의 字이다. 홍역과 마마의 유행으로부터 동리의 아이들을 염려하는 심정과 鄕校에서의 白場에 대해 상의하고자 하는 뜻을 말하고 있다.
上伯兄-甲子 (29)
1804. 伯兄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손님 접대 등 급제자를 발표한 후의 사정과 함께 오랜 기간 떠나 있었던 집안의 안부를 묻고 있다.
與李聖應-辛未 (29)
1811. 이정제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龍院文會의 시행에 어려웠던 점과 文會의 준비에 관해 말하고 있다.
答甥姪崔世秤-丙子 (30)
1816. 조카인 崔世稱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歲暮의 정황과 함께 가정의 안녕에 대한 바람 등을 적고 있다.
卷四
記
奉事孫公配崔氏旌閭重修記 (1)
烈婦인 月城 崔氏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을 중수하며 지은 記이다. 奉事인 孫公은 임진왜란 때에 모친과 함께 龜尾山에 숨었으나 적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 그 처인 최씨는 손공 모자의 시신을 수습한 후 자결하였고, 조정에서는 최씨를 위해 정려문을 세웠다.
巖齋記 (2)
月城의 李君이 1824년 가을에 만든 巖齋를 위해 지은 記이다.
影光亭記 (3)
영광정의 내력을 적은 기이다. 영광정은 月城에 사는 李和之의 증조부가 品題한 것이다. 이화지가 영광정의 기를 부탁한 일과 그의 증조부가 影光이라 명명한 뜻을 기술하였다.
龜巖書堂記 (4)
귀암서당의 위치와 설립경위 등을 적은 기이다. 귀암서당은 이정익이 몇몇 동지들과 함께 龜巖 아래에 지은 건물이다. 會友軒이라 명명한 가운데 두 칸을 중심으로 좌측 한 칸의 藏書室과 우측 한 칸의 輔仁齋 등 총 다섯 칸으로 구성된 서당의 구조와 주변 경관 및 명칭에 담긴 의미 등을 기술하였다.
不能巖記 (6)
불능암에 대한 기이다. 불능암은 龜巖의 다른 이름이며, 그 정상에는 6, 70명이 앉을만한 공간이 있다. 이정익은 1818년 봄에 불능암 아래에 書社를 지었다. 이에 ‘不能’의 의미를 살펴보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뜻을 말하고 있다.
甘華亭記 (8)
이정익이 세운 감화정에 대한 기이다. 선비로서 세상에서 甘과 華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뜻을 말하며 甘華의 참뜻을 되새기고 있다.
張孝子旌閭重修記 (10)
효자 張莫同을 위해 세운 정려문을 중수하며 지은 기이다. 이정익이 『東京記』에 적힌 장막동의 일화를 읽고 감동했던 일 등을 기술하며 그의 정려문을 길이 보존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記夢 (11)
이상익이 1808년 8월 9일 밤에 꾸었던 꿈에 대한 기록이다.
夢蘭記 (11)
1786년 섣달 12일 밤의 꿈에 보았던 보랏빛 난초에 대한 기록이다.
跋
求忠堂詩跋 (12)
求忠堂 李義立(1621∼1694)의 시집에 덧붙인 발문이다. 同知中樞府事 이의립의 軍國의 뜻과 민생에의 공을 말하고 있다.
鄕約條目後跋 (13)
향약조목을 기술한 글에 덧붙인 발문이다. 『예기』 「學記」의 “大信不約”이나 ‘誓’와 ‘盟’ 등을 언급하며 ‘約’의 필요성과 의의를 설명하고, 朱熹(1130∼1200)와 趙光祖(1482∼1519) 등 향약 시행의 선구자 등을 거론하여 그 효용을 말하고 있다.
書朱書節要抄後 (14)
『朱子書節要』 抄本의 뒤에 덧붙인 발문이다. 『주자서절요』는 송나라의 魯齋 王栢이 주희의 글을 모아 편찬하였고, 李滉(1501∼1570) 또한 이를 쫓았다. 이에 담긴 선현들의 뜻을 잇고자 하는 바람을 기술하였다.
書樂育齋同硏錄後 (15)
樂育齋 同硏錄의 뒤에 덧붙인 글이다. 낙육재는 지방의 선비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던 이들의 성명과 사는 곳 등을 기록한 동연록을 만들며 그 의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書金孝子行錄卷首 (16)
韓愈(766∼824)의 「董生行」이나 孔子와 曾子의 사례 등에 나타난 孝의 의의에 대해 언급하고, 金麗成 이하 경주 김씨 문중의 대를 이은 효행을 상찬하고 있다.
龜社詩板小識 (18)
龜社에 참여한 인물들의 시를 적은 판에 기술한 小識이다. 예부터 이어온 園林과 詩社의 의의를 말하고, 詩板에 담긴 시의 제목 아래에 齋號나 姓號를 적어 작자를 구별한 뜻 등을 기술하였다.
說
忍愼二字說贈李戚和之 (19)
李和之에게 ‘忍’과 ‘愼’ 두 글자에 담긴 교훈을 일러주는 글이다. ‘인’은 처지와 언행이 제약을 받아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얻을 수 있고, ‘신’은 보는 이가 없어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데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贊
鏡中得肖像因自贊 (20)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느낀 바를 읊은 贊이다. 세상사의 是非를 가리기 어려움을 거울에 비친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銘
眼鏡銘 (20)
눈이 밝았다는 고대의 離婁 등을 언급하며 眼鏡의 장점을 적은 銘이다.
雜著
字訣 (20)
酉ㆍ乙ㆍ子ㆍ巳ㆍ午ㆍ申ㆍ丁 등 일곱 글자의 의미를 음양과 방위의 원리로 설명하는 訣이다. 일곱 글자를 정의하는 운문과 이에 대한 訣解로 구성되어 있다.
自警 (21)
張載(1020∼1077) 등 先儒들의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에게 자중할 것을 다짐하는 글이다.
贈李秀才秀駿 (21)
秀才인 李秀駿에게 써 준 24자의 짧은 글이다. 이수준은 조부인 李德鉉(1763∼?)이 都訓長으로서 주관한 講會에서 12세의 나이로 상을 받게 되었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이정익이 이 글을 지어 주었다.
心經講義 (21)
心學의 쇠퇴에 대한 우려와 함께 西山 眞德秀(1178∼1235)가 『心經』을 지은 뜻 등을 되새기며, 옛 聖人들의 心法을 전하고자 하는 바람을 기술하고 있다. 조목별로 先儒들의 해석과 자신의 견해 등을 기술하였는데, 모두 다음과 같은 35조목으로 되어 있다. 「程林隱心學圖」ㆍ「道心爲主人心聽命」ㆍ「王魯齊人心道心圖」ㆍ「敬以直內義以方外」ㆍ「附註丹書」ㆍ「子絶四註」ㆍ「橫渠淵源」ㆍ「顔淵仲弓地位」ㆍ「戒愼乎其所不睹」ㆍ「趙致道誠幾圖」ㆍ「正心章附註幾事幾心」ㆍ「孔子畏匡人文王囚羑里」ㆍ「獨立孔門」ㆍ「舍去達」ㆍ「朱子曰某之病多在忿懥」ㆍ「五通神何神」ㆍ「禮樂不可斯須去身」ㆍ「附註鞭辟」ㆍ「三國志曹操遺令」ㆍ「伊川勿背塑像」ㆍ「君子反情章附註東銘」ㆍ「君子樂得其道章註回頭錯」ㆍ「孔子不說心」ㆍ「矢人函人」ㆍ「牛山章附註許順之棲心淡泊」ㆍ「西山曰敬靜爲一」ㆍ「仁人心也章小註」ㆍ「西山曰孔門之言仁」ㆍ「董仲舒不得其利」ㆍ「范蘭溪舜跖圖」ㆍ「程子動箴曰習與成性」ㆍ「參爲三才」ㆍ「敬齋箴」ㆍ「存德性道問學」ㆍ「西山出處」.
策題 (39)
시는 사람의 性情에서 나오지만 시마다 그 표현방식은 다르니 이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성정의 올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를 묻는 책제와 이에 대한 논단을 기술하였다.
又 (41)
꿈은 실제가 아니지만 때로는 사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꿈에도 感通의 이치가 있느냐고 묻는 책제와 이에 대한 논단을 기술하였다.
遊周王山錄 (42)
周王山을 유람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이정익은 1813년 9월에 주왕산에 올랐다. 산 아래의 大典寺를 둘러싼 주변의 경관과 주왕산의 명칭에 대한 고증 등을 적고 있다.
卷五
祝文
鳳山祠憂樂齋崔公-東輔-奉安文 (1)
鳳山祠에 憂樂齋 崔東輔를 봉안하며 지은 봉안문이다. 최동보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常享祝文 (1)
제사를 지낼 때에 고인을 기리며 읽는 상향축문이다. 봉안문과 마찬가지로 최동보에 대한 글인 것 같다.
祭文
祭族兄大憲公-鼎揆-文 (1)
족형인 李鼎揆(1735∼?)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宗君修撰善長文 (2)
宗君인 李元祥(1762∼?)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善長은 이원상의 字이다.
祭族弟漢寶文 (3)
족제인 李漢寶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族叔啓甫-憲鍵-文 (4)
족숙인 李憲鍵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孫上舍-星岳-文 (5)
上舍(生員 또는 進士)인 孫星岳(1741∼1813)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鄭上舍-炅-文 (6)
상사인 鄭炅(1741∼1807)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李上舍-述賢-文 (7)
상사인 李述賢(1736∼1822)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李監役-樹仁-文 (8)
繕工監假監役을 지낸 李樹仁(1739∼1822)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南正言-景羲-文 (9)
司諫院正言을 지낸 南景羲(1748∼1812)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崔漆原聖會-心健-文 (11)
漆原縣監을 지낸 崔心健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聖會는 최심건의 字이다.
祭崔穉玉文 (12)
崔穉玉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孫明汝文 (13)
孫明汝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崔景至文 (14)
陶窩 崔景至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任持國文 (14)
任持國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從叔父處士公-憲質-文 (15)
從叔父인 李憲質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再從兄-鼎台-文 (16)
再從兄인 李鼎台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再從弟-鼎榦-文 (18)
再從弟인 李鼎榦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伯兄處士公文 (19)
백형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仲兄處士公文 (20)
중형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祭亡弟鼎健文 (21)
후사도 없이 단명한 동생인 李鼎健을 위한 제문이다.
悼亡子老祥文 (22)
죽은 아들인 老祥을 애도하는 글이다.
上樑文
龜巖書堂上樑文 (23)
1818. 귀암서당의 상량문이다.
鳳山祠廟宇上梁文 (24)
鳳山祠에 憂樂齋 崔東輔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廟宇의 상량문이다.
任仲素-繪-私第上梁文 (26)
仲素 任繪의 집을 지으며 만든 상량문이다.
傳
月城李氏五孝子傳 (28)
月城의 李綏가 부탁한 月城 李氏 집안의 다섯 효자에 대한 글이다. 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효자들을 배출한 사실에 대한 상찬과 함께, 다섯 효자들의 사적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첫 번째 효자인 李慶男은 임진왜란 때 倡義하여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다. 두 번째 효자인 李禎은 이경남의 玄孫이고, 세 번째 효자인 李綏泰는 이정의 아들이다. 네 번째 효자인 李德賢과 다섯 번째 효자인 李光夏는 각각 이수태의 조카와 再從弟인데, 둘 다 부모가 위중하자 부모를 위해 斷指했던 인물들이다.
墓碣銘
愚軒鄭公墓碣銘-幷序 (31)
愚軒 鄭四象(1563∼?)의 묘갈명이다. 정사상은 字가 汝燮이고 烏川 사람이다. 평소에 정사상을 흠모하던 심경과 정사상의 世系 등을 기술하였다.
贈通政大夫工曹參議月城李公墓碣銘-幷序 (33)
李夢星의 묘갈명이다. 이몽성의 아들은 陰城訓導를 지낸 李厚根이니, 바로 이정익의 조부이다. 이몽성이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通政大夫工曹參議에 추증된 일과 그의 관작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는 사정 등을 기술하였다.
卷六
附錄
家狀 (1)
이정익의 차남인 李公祥이 지은 가장이다. 이정익의 家系와 생애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정익은 이언적의 8대손으로, 어린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도 없이 홀로 학문에 몰두하였다. 네 명의 형제들이 모두 먼저 죽었어도 동요하지 않고 가정의 화를 잘 견뎌냈으며, 뒤늦게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관직에의 뜻은 없었다. 甘華亭과 귀암서당은 이정익이 지인들과 교류하고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다.
行狀 (3)
族姪인 李鍾祥이 지은 이정익의 행장이다. 이 행장은 이정익이 죽은 지 40여년이 지나 그의 손자인 李在潞가 조부의 행적이 잊혀질 것을 염려함으로 인해 짓게 된 것이다. 驪州 李氏는 고려 때의 鄕貢進士인 李世貞으로부터 시작되었고, 文元公 이제현에 의해 가문을 알리게 되었다. 이정익은 이제현의 8대손으로 世居地인 院洞里에서 태어났다. 1771년과 1799년에 각각 부친과 모친을 여의었고 형 둘과 남동생 둘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1804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宏詞試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龜巖書社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책을 좋아하여 『漢書』와 唐詩 등을 옮겨 적은 것이 많았지만, 특히 朱書에 힘을 쏟았다. 슬하에 3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
墓碣銘-幷序 (6)
族弟인 李鼎儼이 지은 이정익의 묘갈명이다.
碑陰小識 (8)
族姪인 李鍾祥이 이정익의 묘비 뒷면에 추모의 심경을 새긴 짧은 글이다.
挽詞 (8)
李憲錫 이하 51명이 지은 이정익의 만사이다.
跋 (1)
崔鉉弼(1860∼?)이 지은 발문이다. 이정익의 삶을 개괄하며, 이정익의 冑孫(현손 이하의 장손)인 李傳久가 그의 三從弟인 李瑢久를 통해 부탁하여 卷尾에 발문을 적게된 사정을 함께 말하고 있다.
文集後小識 (1)
1912. 曾孫인 李能吾가 甘華集의 말미에 덧붙인 짧은 글이다. 이정익의 遺集이 전해지게 된 경위와 편찬에 이르게 된 사정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