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산집(活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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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규장각 도서자료 연구사업(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문서종류문집 해설

본문

活山先生文集序 (序1)
1790. 丁範祖(1723∼1801)가 지은 序로, 序를 쓰게 된 동기를 언급하는 동시에 남용만의 건장한 용모와 경사에 관통한 글, 그리고 막을 수 없는 기질과 徵士로서의 품격을 언급했다.
活山先生文集序 (序7)
1793. 洪良浩(1724∼1802)가 지은 序로, 남용만의 仲子 景羲의 부탁으로 序를 쓰게 된 경위와 남용만의 명성과 강학, 그리고 넓은 학문과 두터운 기질을 언급했다.

卷之一
次幽通賦-幷小序 (1)
班固가 지은 「幽通」이라는 글을 빌려서 지은 賦로, 반고가 처한 상황, 즉 賢良의 길이 막혔던 상황을 극복한 방식을 통해 당시의 時命의 通塞을 드러냄으로 자신이 만난 상황에 편안하고 원망을 적게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그가 爲己를 강조한 것이나 바름을 지켜 미혹되지 않는 것 및 樂天知命을 주장한 것 등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詩 (1)
閒居八詠(城頭曉角, 野村朝霞, 山陰暮煙, 鳳臺夜鍾, 桃峯春嵐, 龍山夏雲, 東林秋雨, 北郭冬松), 逢平海士人爲余誦其大夫申詞伯-維翰-之詩詩用漢文公出宰山水郡讀書松桂林之句逐字補押分作十絶余愛其蒼然多古色於無聯中效而爲之隔面酬和答本篇之意亦春陵不必寄元之例爾, 江干行, 鴟鳩愛怒, 閒閒吟, 兒子就師受小學次韓文公符讀書城南詩二十七韻授而送之, 晝寢戒, 徐夕吟, 曳屐歌, 擊爐歌, 木綿歌, 樵奴詞, 頭謝詩-幷小序, 牧牛詞, 解鳥音詞-幷小序(鷄音, 雉音, 鳸音, 鵲音, 鳩音), 和仲兒蓬萊圖行, 次丁法正-範祖-奉敎建功歌, 天對兼山子乞明詞, 見蜘蛛結網, 半月城, 書懷, 六歎(歎口不給, 歎耳不聰, 歎目不明, 歎手不巧, 歎足不捷, 歎心不慧), 次唐詩六首-幷小序(採蓮曲, 江南曲, 效崔國輔體, 怨詞, 古意, 無題), 丁巳四月忘其日蒙余在影湖自北方有呵喝聲俄見靑傘翩翩問之則時方大旱遣崔孤雲行旱云嚴君謂余曰此老必來訪來則難與酬應可先以詩謝送因命余促賦一絶余立得口對嚴君曰僅可但末句中卽字未穩然他無可代字速書送之遂唯命書于簡末簡胎未省詩曰, 與孫姨兄永叔-應九-同逾鳥嶺南下孫兄占韻要押馬上口號-二疊, 扣盆吟, 居鰥與爨婢問答, 自芬庵晩歸, 別閒溪故莊, 至日, 人嘲前篇詩思太苦更步道懷, 書懷, 答花溪柳婦翁-宜健, 過妻詳移主壁龕, 聞花溪柳公病暑阻雨不得進送童奚致酒奚忘棄酒壺而去其還遺詩譏其紿人次謝, 將向盤龜到玉泉庵呼韻, 上玉蓮庵, 上盤龜亭, 宿盤龜寺, 龜亭次權參判韻, 次亭閣板上韻, 賀李景淳-憲洛-新恩, 更步前韻道懷, 花溪柳公聞室人久病寄詩道悶次謝, 次李欽夫-猷遠-柏湖亭韻, 送南丞宣-泰耆-奉使日本排律十六韻, 雪夜書懷仍憶韓二排律二十六韻, 更步前韻寄呈花溪書堂, 寄賀李伯容-憲黙-聞喜慶席, 織布詞, 寓中卽事, 題李伯容畵帖(松鶴, 月梅, 蟠梅, 煙梅, 折梅, 梅竹), 挽黃上舍乃沃-命啓, 次徐上舍夢膺-錫麟-木癭瓢韻, 元宵花溪柳公來留覓酒次謝, 春感-回文體, 崔貞武公賜祭宴席次禮官韻, 謝恩時玉候不平權停親臨之典前日夢入侍殿上望闕不覺悵昻, 幽谷郵館幽別主丞, 鶴城逢權士安-正宅-呼韻酬和, 鷗江院齋與士安相酬, 更步士安韻贈李肯若, 憩鳥嶺關, 挽成員外-憲祖, 挽鄭參議-重器, 訪槐市上舍族叔-峻衡-次贈帖中韻, 次玩龜亭板上韻, 挽李士仰-斗遠, 種桃, 次金參判-虎-贈職焚黃韻, 忠原路上遇霧塞, 汶亭獨宿感題, 萬歲樓對見南庵, 眠鏡-二首, 上鵄述嶺, 利見臺憶文武王故事, 挽花溪柳公, 除夕日洪府伯-良浩-送活鷄, 贈大猷上人, 鳳棲山次任大年杜鵑詩, 五峯禪送大紙吟謝, 東都懷古-八首(月城春草, 汶江夜月, 鰲山晩煙, 鷄林霜葉, 仙桃晴嵐, 柏栗午鍾, 鳳臺古樹, 巫峽重峯), 贐洪府伯還京-八疊, 凶年遣懷, 上本跡庵次贈猷上人, 盤龜院齋與徐上舍夢膺呼韻各賦, 洪耳溪出尹義州有詩十數篇寄示次呈(龍灣, 統軍亭, 箕子城, 浮碧樓), 挽李上舍-惠中.

卷之二
詩 (1)
次益齋瀟湘八景詩韻-幷小序(遠浦歸帆, 平沙落鴈, 洞庭秋月, 瀟湘夜雨, 山市晴嵐, 江天暮雪, 煙寺暮鍾, 漁村落照), 次蔣君琴湖十景韻(琴浦歸帆, 魚峀霽月, 九曲江潮, 廣灘漁火, 一行沙鴈, 德城樵歌, 土橋牧篴, 廊山疎竹, 獨洞寒松, 龍村暮煙), 見兒得老松一根使樹之庭畔, 求種梅樹不得, 種地黃, 治紫菊壇, 連夜夢入侍筵中, 汶亭獨宿遇雪吟寄崔伯源-宗謙, 聞冬至使發程感題, 題義士李公-彭壽-行蹟後-癸卯, 宋伯猷-履錫-遊盤龜得二絶來求和, 挽徐上舍夢膺, 挽權士安-幷小序, 見兒賦楊柳詞意態俱姸喜甚次示, 府伯嗜櫻桃茶見求摘送一榼便同西蜀野人之進次杜詩韻以寄, 宿影湖書堂困於蚊蝎達夜不寐, 治瓜畦, 種蘇燈木, 種烏竹, 自嘲, 解嘲, 初度日兒輩請設小酌許以翼日行之感題, 崔行餘-達文-奇詩嘲以不見速次謝, 淫雨閱月麥料告絶已久夜坐獨吟, 挽金上舍君弼, 哀鄭潤叟, 臨深齋次贈主人, 族姪時彦-景玉-來詫寓莊八景示詩韻請和(南湖夜月, 東村漁歌, 魚臺宿雲, 松浦晴煙, 一點竹島, 半面雲山, 夕浦歸帆, 夜磯漁燈), 金海許君遺斑竹杖點痕鱗次成文甚可奇愛, 遣懷, 次醉睡軒詩韻, 次寄蘆洞會友除夕韻-幷小序(和臘懷, 寄鄭汝輝-煜, 寄李萬甫-憲國, 寄李乃貞-晩松, 記寓狀, 又用前韻述懷變體-二首), 哭任大年, 次題許貞簡公遺事後, 春眠, 往年亡弟汝兼以槐院參下將赴洛時花溪柳公以詩送于汶陽亭上使和之其首尾皆不可記腰聯曰一千里外將行客九十韶光欲暮時柳公心惜其有落霞孤鶩之意而强許其甚工云今年夏任注書以由限將迫冒炎而西余又送之汶上追感家弟詩補其韻以贐行, 挽金生瑞迪, 挽金佐郞-必源, 挽李注書-泰斗, 誚杜鵑, 解杜鵑, 誚烏啼, 解烏啼, 誚獐鳴, 解獐鳴, 誚鴟嘯, 解鴟嘯, 誚荒鷄, 解荒鷄, 效唐詩體-幷小序(少年行, 靑樓怨, 長門怨, 靑樓曲, 春宮曲, 淸平詞, 長信怨, 塞下曲, 塞上曲, 采蓮曲, 竹枝詞, 楊柳詞, 凉州詞, 明妃詞, 宮人詞, 伊州歌, 瑤池詞, 漢宮詞, 金陵圖, 銅雀臺), 李大山景文-象靖-爲康翎倅未赴彈罷詩以賀呈, 除歲佛國山房, 昆爐庵吟寄希有上人, 江干行, 會遊凝川潭上暮泊樓下, 登萊州城樓, 永嘉臺次楣上韻, 鶴城路歷訪故人家暫與少年酬答回馬更步前韻, 過鷗江院樓, 申士觀有紅梅百日紅二種請詩書寄(百日紅, 紅梅花), 萬歸亭次楣上韻留贈主人, 李乃貞聞科報急歸做功令寄詩嘲謔(三疊), 春寒極猛甚於冬令, 挽李上舍若天-象辰, 挽徐巨源, 癸巳二月初六日夜夢不省何地衣冠多會云有孔子之喪使余告訃於曾子余曰不加道袍只着中單衣奈何會中曰喪是蒼黃間事曾子方寢疾便服無妨余乃就開戶入室有好丈夫正席而臥長面丹潤疎髥盡白合眼如睡余跪于前俯而告曰夫子薨曾子蹶然起坐兩手執余袖伏哭大聲聲甚慟余亦哭未接語而覺心竊異之起得一絶, 奉玩孫氏古藏恩賜三物各賦一絶以送俾要好客酬和(玉硯滴, 珊瑚纓, 寶刀), 挽崔進士泰一-宗嵂, 壽崔護軍-達道-八十四歲, 挽任仲徵, 明道先生和打乖吟二首推許堯夫極隆敢次以懷仰兩先生, 十老詩(老將, 老奴, 老馬, 老妓, 老儒, 老僧, 老醫, 老吏, 老妾, 老兵), 寶鏡寺遇寧鄕舊知尋內延, 上浮石寺樓, 祖師殿前見仙飛花木敬次老先生韻, 再訪豐基使君丁法正, 王考寓庵府君墓立石時感懷(二疊), 北征錄(興海境上遇黃石其下有子房村, 投寶鏡寺兩新恩入內延老脚不能從, 沿海路上, 入元坡故里, 花田榮奠後宿齋閣, 上月松亭, 窟峯特立海岸, 憩霞巖(二首), 訪佛影寺路上, 宿佛影寺家兒先得五言從遊者各賦, 大興寺次板上韻, 拍琴村與宗人夜話主人乞句甚懇, 酒泉臺次帖中韻, 酒臺古晩休堂任公-有後-所占云, 拜辭先隴, 族叔解五別莊, 訪蒙泉精舍, 上望洋亭, 宿槐市亭三從弟伯溫-基萬-晩到夜話復得如字, 將還三從弟元之-大萬-賦詩送別次謝, 宿族姪時彦候風亭次贈, 復從曲江路訪崔上舍-天翼-上舍請留詩次帖中韻, 曲江崔上舍爲書齋于瓢巖作詩求和), 譴睡魔, 有意外除命以病辭更令道臣催送呈病待命, 七月承恩至冬末未得遞代, 次敬順王殿寫眞奉安時韻, 次李令伯容留題韻書寄樂浪郡齋, 丁酉初冬率新恩遊故土訪族叔上舍公於槐市亭上邀會伯溫正字止宿鼎席而坐達宵言詩公年迫八旬鋒穎不摧若將凌駕座中謔笑爛熳明朝留期而返周歲而公沒矣衰病不能赴會葬追記當日韻語重步一律要掛佳城宿草, 挽安殿中殷老-景說, 次德洞世德詞韻, 挽朴稽仲-㒞相, 挽金參奉-紘, 達田洞贈孫姨弟季心-國濟, 次憑虛樓板上韻(三首), 挽李汝寬, 次宋進士回榜宴詩韻追寄奉賀, 新莊八詠, 挽金章叔-玉相, 挽崔行餘, 挽鄭學古-師夏, 挽李圖萬-運鵬, 挽鄭汝輝, 挽任戚-藎世, 挽任進士-一鑌, 有感.

卷之三
應旨疏 (1)
임금의 求言에 응한 疏로, 敎旨의 내용에 일일이 대응하며 10조목에 걸쳐 당시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자신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營門(=監營)에 보냈지만 반려되어 임금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그 10조목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는 명분을 바로 세우는 문제로, 당시는 民志가 안정되지 않은지 오래되어 그 본분을 망각함으로 온 나라에 혼란과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분수를 바르게 하여 강령을 세우면 등급이 저절로 나누어져 혼란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도학을 숭상하여 山林의 훌륭한 선비를 이르게 하는 문제로, 당시처럼 입과 말에서가 아니라 옛날처럼 도를 마음에서 얻고 자기(己)에게 두어 거짓이 없으면 도학이 잡되지 않아 재덕이 겸비된 선비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절검하여 재용을 풍부하게 하는 문제로, 임금이 몸소 절검의 모범을 보이면 재용이 넉넉해져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며, 나아가 나라도 풍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충성과 사특함을 구별하여 붕당을 그치게 하는 문제로, 당시의 黨禍로 인한 국가의 위태함을 걱정하면서 제환공과 郭나라 父老의 대화를 예로 들며 선한 자를 선하게 여겨 등용하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겨 내처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금의 결단을 촉구했다. 다섯째는 염치를 권장하여 풍속을 진작시키는 문제로, 관자의 말처럼 예의염치가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염치가 없게 되면 오직 이익만 추구하게 되고, 또 하지 못하는 짓이 없게 되어 貪汚의 풍속이 극성을 부리게 되고, 또 公利를 폐하고 私利만을 도모하기 때문이라 보았다. 여섯째는 聽納(남의 말을 받아들임)을 넓혀 言路를 열리게 하는 문제로, 임금은 사방의 총명함으로 자신의 총명함으로 삼아야지 측근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인의 안색을 살펴 그것에만 맞추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곱째는 銓官을 뽑아 選擧를 공정하게 하는 문제로, 당시의 銓官을 자주 교체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 자리에 오래 있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덟째는 무신을 뽑아 軍權(戎權)을 단련하는 문제로, 평안한 평소에 전쟁을 잊지 말고 방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홉째는 考課(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일)를 밝혀 수령들을 뛰어나게 하는 문제로, 당시의 민심에 맞지 않은 고과문제를 거론하며 탐관오리가 생기고 좋은 관리가 적은데도 오히려 자주 바꾸지 않아 백성들이 고통을 당함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신중하고 공정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째는 面試를 행함으로 과장을 엄격하게 하는 문제로, 당시의 科弊를 지적하면서 그것을 막은 후에 面試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敬을 주로 해야 마음이 보존될 수 있으며, 마음이 보존되어야 이상의 10조목이 행해질 수 있으며, 10조목이 행해진 후에야 災變이 그칠 수 있다고 하면서 임금의 敬을 통한 마음의 존양을 강조했다.
與李景文 (18)
李象靖(1710∼1781)에게 보낸 書로, 자신의 상황이 知學의 맛을 느끼거나 혈기를 보양하는데는 좋지만 앉아서 바위굴(巖穴)이나 지키는 것은 애석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쇠한 몸 때문에 몸소 가서 선대의 墓表를 부탁하지 못하는 사정을 드러내고 있다.
與李伯容 (18)
李憲黙(1714∼1788)에게 보낸 書로, 고학으로 흰머리가 늘어난 것과 홍진이 아직 깨끗하게 낫지 않아 직접 편지를 받지 못한 상황을 말하면서 편지를 받은 기쁨을 드러내었다.
與李伯容 (19)
李憲黙에게 보낸 書로, 임금의 은덕과 이에 대한 부담 및 나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答李景淳 (19)
李憲洛(1718∼1791)에게 답한 書로, 자신이 궁벽한 구석에 거하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않고, 또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거짓되고 헐뜯는 말이 생긴다는 것과 근거없이 남북 두 곳 사이에서 자신의 성명이 떠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후 사정으로 보아 汶陽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與李景淳 (20)
李憲洛에게 보낸 書로, 거리와 바쁜 국사로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與李景淳 (20)
李憲洛에게 보낸 書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강상태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答洪耳溪 (21)
洪良浩(1724∼1802)에게 답한 書로, 백성을 위해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鄕約條件에서 이전의 잘못은 행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문체(文)만 우승하고 質實함은 없었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며 나중에 李新昌과 朴殿中 등과 상의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고 있다.
答洪耳溪 (22)
洪良浩에게 답한 書로, 나이가 한 살 더 먹으면서 다시 할 수 없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면서 처자의 飢寒을 걱정하는 동시에 章句 밖의 易象度數의 심오한 소재와 제가의 여러 기예의 말에 아직 깊이 이르지 못한 점 등을 언급하고 있다.
答洪耳溪 (24)
洪良浩에게 답한 書로, 안부와 날로 쇠약해지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드러내었다.
與黃參判-景源 (24)
黃景源(1709∼1787)에게 보낸 書로, 일찍이 스스로 세상을 버려 姓名을 두텁게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황경원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시 몇 편을 읽은 소감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번 만나고 싶은 심정을 드러내었다.
與黃參判-景源 (26)
黃景源에게 보낸 書로,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황경원의 뛰어난 문장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與申士觀 (27)
申士觀에게 보낸 書로, 뒤에 別紙가 참가되어 있다. 온 집안이 기대하던 자제의 갑작스러운 단명에 놀라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빼어난 재주와 풍성하고 우아한 文詞를 기렸다.
答鄭監司-存謙 (28)
鄭存謙(1722∼1794)에게 답한 書로,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자신의 근황, 즉 늙고 병들어 이제 아이들과 古文을 얘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로 삼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遺稿의 머리편에 사용할 한 말을 청하고 있다.
答崔伯源 (29)
崔宗謙에게 답한 書로, 일이 촉박하여 엉겁결에 맡게 된 碑文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石面에 쓸 큰 글자를 다른 호칭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答南晦仲-明爕 (29)
南明爕에게 답한 書로, 족보 속에 쓸 내용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며 생각해 보기를 청하고 있다.
答洪掌令-晟 (30)
洪晟에게 답한 書로, 부름에 응하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여러 사정을 언급했다.
與鄭汝輝 (31)
鄭煜에게 보낸 書로,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면하며 악수하면서 축하하고 싶으나 기력이 쇠하여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을 언급하는 동시에 뜻밖에 거듭 보내 온 詩에 대해 기쁨을 드러내고 있다.
與李乃貞 (32)
李晩松에게 보낸 書로, 집에 칩거하여 세상과 접하지 않은지 2년이 되었다며 자신의 근황을 말하면서 보내 온 두 편의 글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與南尙書-泰齊 (32)
南泰齊에게 보낸 書로, 南씨 宗의 각파의 옛 계보를 조사해 보니 잘못된 곳이 많아 하나로 되기 어렵다고 탄식하면서 그 중 특히 南斗彩가 내놓은 古紙의 기록이 지극히 괴이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살펴보고 회답을 줄 것을 청했다.
與南尙書 (33)
南泰齊에게 답한 書로, 다시 한번 斗彩의 邪說을 물리쳐 그 뿌리를 끊어내야 함을 주장하는 동시에 花山의 宗人들이 족보를 합치려는 계획하에 자신으로 하여금 고적을 교정하게 한 결과에 따르면 일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왕복함이 없어서 사이사이에 뒤섞여 들어가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많고, 또 넘치도록 많으나 차례가 없는 것도 나왔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아 주기를 청하고 있다.
與南尙書 (32)
南泰齊에게 보낸 書로, 妖說이 후세를 잘못되게 할까 몹시 두려워서 벌인 일이 혹시 누가 되지 않았는지를 물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與趙聖與 (35)
趙聖與에게 보낸 書로,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묘지와 묘갈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며 그것이 어떤지를 묻고 있다.
答東泉殿郞 (36)
東泉殿郞에게 답한 書로, 비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신라 경순왕을 예로 들며 그것을 쓰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與上舍從兄-震萬 (38)
종형 震萬에게 보낸 書로, 자기의 걱정과 기력이 쇠한 최근의 근황을 전하는 동시에 南泰齊가 宗系에 대한 잘못들을 변론한 인쇄본 두 부를 보내온 것 중 한 부를 보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겨울 종형의 변설이 발단이 되어 생긴 것으로 온 영남의 南씨 諸宗이 이로 인해 수치를 당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자신의 일처리 방식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한양에서 새롭게 간행된 책에도 종형이 편찬한 책이 끼어 있음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근친들과 의론을 같게 해서 문제를 풀어봄이 어떠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斗彩의 僞書는 불태움으로써 온 나라의 남씨들이 나누어지는 근심을 면하자고 하면서 이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청했다.

卷之四
讀孟子篇末 (1)
성인의 탄생과 그 역할을 언급하면서 특히 공자의 도와 학문을 전하고 밝힌 맹자와 주자를 강조한 글이다.
三遷敎子難疑 (1)
劉文忠公이 ‘맹모삼천지교’는 잘못 전해진 것이라 주장한 것과 臧倉이 ‘맹자의 後喪이 前喪보다 나았다’고 주장한 것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것을 변호한 글이다.
論語言志章難疑 (2)
『논어』 ‘言志章’(「先進」25)에서 공자가 ‘임금을 얻어 도를 시행하겠다’는 세 사람(子路‧冉有‧公西華)의 견해를 버리고 曾點과 함께 하겠다고 한 상황적 의미를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공자의 진정한 의도를 규명한 글이다. 즉 군자가 때를 만나면 나아가 도를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득하여 스스로 즐긴다는 것이다.
論語色斯擧矣章難疑 (3)
『논어』 ‘色斯擧矣’章(「鄕黨」17)의 머리구절은 말을 일으키는 단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를 억지로 해석하고자 한 先儒들의 두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 글이다. 그는 이 구절이 簡冊이 顚倒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보고 이를 다시 재조정함으로 그것의 진정한 뜻을 찾고 있는 것이다.
坤卦六爻難疑 (4)
『주역』 坤卦 上六의 “龍戰于野, 其血玄黃”(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을 논하며 程子가 효사의 의미를 이미 남김없이 다 말했기 때문에 아직 그가 말하지 않은 ‘龍’자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풀어쓴 글이다. 그는 여기에서 독자들의 말, 즉 ‘坤六을 龍’이라 한 견해를 비판하고 ‘龍戰’의 ‘龍’은 모두 乾陽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주장하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蒙卦大象難疑 (5)
『주역』 蒙卦 象傳의 “君子以, 果行育德”(군자가 보고서 행실을 과단성있게 하며 덕을 기른다)에 대해 李士仰이 와서 강 오른 쪽에 사는 어떤 사람의 易說을 전해 준 내용, 즉 “果行은 물(水)로서 말한 것이고, 育德은 산(山)으로서 말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쓴 글이다. 남용만은 ‘물로서 말한 것이다’고 한 것은 卦義를 잃은 것이라 말하면서 샘이 산에서 나오는 것이 蒙이고 坎이 괘의 主이기 때문이라 보았다. 또 그의 주장은 坎과 艮 두 괘를 나누어 해석한 것으로 괘를 명명한 본의를 알지 못한 것이라 비판했다.
書洪範篇難疑 (5)
일찍이 泮材齋에 머물 때 齋 중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자신이 『서경』「홍범」편에 ‘착간이 있는 것 같아 마음으로 항상 그것을 의심하였다’고 말하자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 글은 그가 ‘四五紀’와 ‘八庶徵’ 두 장을 토대로 그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深衣續袵鉤邊難疑 (6)
옛날의 ‘續袵鉤邊’의 제도는 궁구하여 고찰할 수 없고, 또 논의가 분분하여 다양한 갈래가 있다고 하면서 주자의 견해, 즉 “鉤邊이란 겨드랑이 아래 양변을 봉합하는 곳이니, 반드시 그 솔기의 나머지를 다시 꿰매어야 하기에 曲針으로 해야 한다”라고 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글이다.
博士對 (7)
진시황이 南郡을 순행할 때 湘에서 바람을 만나자 “湘君은 어떤 신인가”라고 묻자 박사가 “堯女舜妻”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후세는 湘君을 ‘娥皇의 靈’이라 불렀는데, 이 글은 박사의 대답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과 그가 그렇게 대답한 의도를 논증하여 밝힌 것이다. 그 의도는 진시황이 주색에 빠져 돌이키지 않아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며, 또 엄하여 조정에서 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漢孝惠邀四皓書 (8)
漢孝帝가 商山에 숨어 사는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흰 네 선생을 초대하여 부른 경위를 밝힌 글이다. 여기서는 하늘이 선생들을 이 세상에 내린 이유와 진나라 때 이들이 나아가지 않은 까닭 및 惠帝 때 이들이 필요하여 부른 까닭을 언급했다.
原弊 (9)
금슬이 조화롭지 못할 때 줄을 바꾸어 새롭게 하듯이 당시의 명분‧농업‧군정, 그리고 선비들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문제와 교육하는 일 및 선발방식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스림(治體)에 통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이 중 특히 職事가 없으면서도 四民의 우두머리인 선비들을 교육하여 총명하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東海無潮汐辨 (11)
세상에서는 동해에 조석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동서의 구별을 잃은 것으로 서해에 조석이 없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과학적 지식으로 나름대로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慵窩說 (12)
자신이 거처하는 작은 방을 慵窩라고 한 이유와 그 의미를 적은 說이다. 慵은 자신의 심성이 나태하여 평생 조리가 없어 옷도 스스로 가리지 못하고 음식도 자급하지 못하며 학문도 滅裂하여 自力이 없기 때문에 지은 것이다. 그리고 窩는 老友 李孟猷가 “내 집(窩)을 慵이라 부른지 오래되었다”고 한 말에서 양해를 구해 따온 것이다.
息窩說 (14)
姨兄 孫應九가 거처하는 ‘息窩’를 두고 姨兄과 이야기 하면서 그 의미를 다양하게 풀이한 說이다. 그러면서 군자가 때를 기다려 움직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에 쉬게 되는 도라고 하면서, 이 때 자기를 다스리고 마음을 닦아 늙어 죽음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 자세를 강조했다.
崔生瓆字說 (15)
친구 崔宗謙의 부탁으로 그 아들 瓆의 字를 짓고 그 의미를 풀이한 說이다. 여기서 그는 그의 字를 文이라 지어주면서, 그 이름인 瓆과 최근에 玉을 가지고 지은 字와 연결시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즉 “그 바탕(質)이 이미 玉이니 저절로 부득불 文이라 해야 한다. 옥에 문체(文)가 없다면 어찌 귀하겠는가?”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崔璥字說 (16)
친구 崔泰一의 부탁으로 그 아들 璥의 字를 지어주면서 지은 說이다. 우선 “옥을 잡은 사람은 반드시 공경한다”라고 그 이름(璥)을 풀면서 孝如라는 字를 지어주었다. 그러면서 임금을 섬길 때는 마치 옥을 잡은 자가 반드시 공경하듯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敬으로 어버이를 섬길 때도 孝라고 말하고, 이름과 字를 서로 연결시켜 풀고 있다.
李君復字說 (17)
친구 李規中가 이름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申周伯이 ‘規’를 ‘敦’으로 바꾸고 字를 ‘君復’으로 할 것을 제안한 것에 대해 자신(남용만)에게 그 뜻을 물어온 것에 대답하며 지은 說이다. 그는 ‘敦’은 타인에게 두텁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敦이 지나칠 경우 생기는 문제점을 되돌려서 두터우면서도 中을 얻는 것에 ‘復卦’의 九五를 끌어들여 설명했다. 그리하여 이름인 敦과 字인 復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八峯窩說 (18)
친구 李晦叔의 부탁으로 그의 산장 ‘八峯窩’에 대해 지은 說이다. 여기서는 이회숙이 “峯의 주위는 팔방에 에워싸여 있어 바로 팔괘의 자리를 얻은 것이다”라고 한 것을 토대로 팔봉와라 지은 것의 문제점과 그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臨深齋說 (19)
永陽 安氏의 거처가 있고 玩龜亭이 있는 곳에 있는 ‘臨深齋’에 대해 적은 說로, 그 지역과 齋의 이름의 연원 및 그 건물구조와 이름이 지닌 의미를 언급하고 있다.
暗谷說 (21)
崔魯瞻이 새로 지은 농막을 ‘暗谷’이라 이름한 연유를 서로 문답하면서 지은 說로, 暗谷 주변의 풍광과 그 이름의 의미를 천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골짜기는 실제로는 어둡지 않다”고 밝혔다.
閒閒亭說 (23)
자신의 정자를 ‘閒閒亭’이라 지은 이유를 언급한 說로, ‘閒’을 중첩한 이유는 마음과 손이 모두 쉬어서 이익을 쫓아 불선함에 빠지는 우를 범치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賀石說 (23)
자신 주변의 돌의 다양한 쓰임을 언급하면서 그 돌의 기능을 치하한 說이다. 즉 행랑을 만들 때는 섬돌이 되었다가 밭에 흩어져 있을 때는 주인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바 되며, 또 그것이 쌓여 산처럼 되면 도리어 사랑받는 것이 되는 다양한 돌의 기능을 다루며 치하한 것이다.
活山說 (23)
자신의 號를 活山이라 한 경위를 쓴 說이다. 鷄林府의 鎭山을 이름하여 ‘明活山’이라 하는데, 자신이 거처하는 이 산이 땔나무와 채소 및 물을 제공하여 자신을 살게 함으로 그 산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辭封人祝論 (25)
堯임금의 祝이 된 封人이 요임금을 위해 수명(壽)‧부유함(富)‧남자를 많게 하겠다(多男子)고 한 것에 대해 요임금이 그것을 사양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 그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밝힌 論이다. 이것들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미 정해진 천명이므로 요임금이 祝에게 청하여 말한 것은 어찌 이미 정해진 하늘에 맡기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지 사사로운 뜻으로 그것을 사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록자가 요가 사양했다고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 요임금은 이 세 가지는 하늘이 주는 것으로 봉인이 빈다고 이르는 것도 아니라 보았다는 것이다.
泣罪人論 (27)
禹임금이 죄인을 보고서 울었느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한 論으로, 남용만은 “만약 우임금이 진실로 울었다면, 이것은 우임금이 천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 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부인이나 동자의 情態를 드러낸 것일 뿐이니 반드시 이러한 현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伍員復讎論 (29)
楚나라 平王이 秦女에게 미혹되어 태자를 죽이려 하자 태자의 태부였던 伍奢가 이를 막으려다 죽게 되면서, 그 둘째 아들 員이 吳나라로 도망가서 오나라 병사가 [초나라의 수도인] 郢에 쳐들어간 것을 기회로 이미 죽은 평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그 뼈에 채찍을 가함으로서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사건을 가지고 그 정당성을 논란한 論이다. 사마천은 이를 두고 “員이 小義를 버리고 큰 수치를 씻었으니 烈丈夫가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는데, 남용만은 이에 반대하면서 忠孝一致‧君父無間이라는 관점으로 伍氏 일가는 대대로 초나라에 벼슬했으니 평왕이 태자를 죽이고자 할 때 伍奢가 신하의 신분으로 죽음으로 간하는 것은 당연하며, 또 員도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지력을 다하여 군신의 의를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하고, 만약 그럴 수 없으면 죽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九世同居論 (31)
張氏가 한 집안에 9대를 함께 살게 한 것에 대해 그것이 불가함을 주장한 論으로, 그 이유로는 한 집안에 두 사람의 존귀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집을 주관하는 사람의 문제, 衆親이 함께 그 솥을 사용할 경우 소원하고 친한 구별이 발생한다는 것과 親이 다하면 情도 다한다는 문제, 그리고 대대로 고조 이상의 親에게 祖廟에 遞遷하지 먼 조상은 제사하지 않는 문제와 대대로 그 伯叔兄弟의 廟를 나누어 한 廟에 배향하지 않는다는 문제 등을 들었다.
順勝論 (33)
사람이 태어나면 일에는 勝天해야 하고 마음으로는 順天해야 한다고 하면서 쓴 論으로, 順天해야 하는 이유는 五倫은 天理‧天倫‧天德이므로 사람이 그 이치나 윤리 및 그 덕을 따르고 닦으며 보존하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勝天해야 하는 이유는 예컨대 비는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데 사람이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습병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卷之五
送洪明府-良浩-祖席詩軸序 (1)
洪良浩를 떠나보내며 그의 詩 두루마리에 쓴 序로, 홍양호의 업적과 歌頌의 발생과정 및 자신이 서를 쓰게 된 이유를 언급했다.
送洪學士-良浩-赴燕京序 (2)
국서를 가지고 연경으로 가는 洪良浩를 떠나보내며 쓴 序로, 그의 빼어난 문장을 칭찬하며 中夏를 압도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徐道卿宴席題名錄序 (3)
친구 徐道卿이 69세를 맞아 그 아들 錫範 형제가 연 잔치에 참석하여 宴席題名錄에 쓴 序로, 서를 쓰게 된 경위를 적었다.
遁翁遺集序 (4)
韓遁翁의 손자 國鳴의 부탁으로 『遁翁遺集』에 쓴 序로, 그 한 글자 한 구절이 근본을 탐색하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眞知實得을 귀하게 여긴 것이라 평가했다. 그 중 중용절목의 순서를 대학의 혈구지도에 분배한 것이나, 편안하게 번거롭지 않으면서도 장점을 얻은 그의 易說이 옛 군자의 極處에 도달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送南丞宣奉使日本詩序 (6)
같은 宗氏인 承宣公 南泰耆를 일본사신으로 떠나보내면서 近體 16韻을 얻어 그 앞에 쓴 序로, 일본과 조선과의 역대관계와 자신이 얻은 점괘를 언급하면서 축복했다.
送濟州人序 (7)
濟州通判으로 있었던 王考 寓庵公 南九明이 죽은지 23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부음을 듣고 제주 토산물과 布木 등을 지고서 찾아온 세 사람을 전송하며 쓴 序로, 그들이 늦게 찾아 오게 된 경위와 까닭 및 약 30일이 걸린 이유와 그들의 정성에 자신이 감동한 사연을 적었다.
英陽南氏族譜序 (9)
英陽 南氏의 族譜에 쓴 序로, 남씨의 연원과 전개 및 남씨 내의 다른 족보와의 기록차이와 그렇게 된 까닭 등을 적었다.
詠歸亭記 (11)
詠歸亭이라 이름지어진 내력과 그 주변경관을 언급하는 동시에 曾點과 같은 기상을 지닌 사람이 후세에 나타나길 기대하며 적은 記이다.
育英齋重修記 (13)
育英齋를 重修하면서 적은 記로, 齋의 이름이 세 번 바뀐 과정과 용도 및 이를 중수한 사람(宋徵啓)과 중수과정을 적었다.
愛菊軒記 (14)
친구 鄭煜이 지은 집에 愛菊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쓴 記로, 역대 국화를 사랑한 사람을 언급하는 동시에 국화가 지닌 절의라는 의미를 친구에게도 부여하면서 격려하고 있다.
盤龜亭重創記 (15)
옛 盤龜亭이 불타자 이를 새롭게 重創하면서 쓴 記로, 옛 盤龜亭을 지은 사람(崔得之)과 그것의 빼어난 경치 및 그것이 불타자 太守 宋徵啓의 도움으로 창건자의 자손 履謙이 이를 중창하는 과정을 적었다.
憑虛樓重修記 (17)
憑虛樓를 重修하면서 지은 記로, 그것의 소유주(任氏)와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 및 아래가 땅이 아니라 물과 거리를 두고 공중에 떠있는 구조라는 건물구조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것의 창건일과 다시 지은 날짜와 보수한 날짜를 기록했다. 그리고 자신이 記를 짓게 된 경위와 보수과정 및 그 이름의 의미를 적었다.
從吾軒記 (19)
崔君의 별장인 從吾軒을 위해 지은 記로, 집의 주변경관과 七寶山 북쪽 모퉁이로 移建한 정황 및 주인의 생각과 그가 이렇게 이름한 이유, 즉 공자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從吾所好)고 한 것을 가지고 이름을 지었음을 밝혔다.
竹窩記 (20)
漁來山 陽竹洞에 있는 辛命祉의 집인 竹窩를 위해 지은 記로, 窩를 위해 설을 짓기로 하고도 잊은 사실과 주변에 대나무가 없는데도 이렇게 이름한 경위 및 신명지의 삶의 태도를 언급했다.
道睦堂記 (21)
英陽縣 道睦洞에 있는 道睦堂을 위해 지은 記로, 이 집이 여기에 있게 된 까닭과 1753년에 좁고 누추하여 좀 더 넓혀 재건한 사실 및 공사과정과 道睦堂이라 이름한 까닭을 언급했다. 道는 導와 같은 글자이고 睦은 종족이 모여 차례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이며 堂은 여기에 모여 그렇게 하기에 명명한 것이라 풀고 있다.
槐市亭記 (22)
族叔 南峻衡의 槐市亭을 위해 지은 記로, 족숙이 정자 이름을 槐市라 지은 연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뜻을 기렸다. 槐市는 원래 魯나라 昌平縣 夫子里에 있던 것이었는데 稼亭 李先生이 자신이 머물던 집을 그것으로 이름지었고, 족숙도 이것을 가지고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佛國寺重創丹雘記 (24)
佛國寺의 重創과 丹雘(丹砂와 辰砂로 칠하는 것)에 즈음하여 지은 記로, 불국사의 본래의 위상과 퇴락함 및 그것을 다시 重創하고 丹雘하게 된 과정을 적었다. 그리고 처음 배울 때부터 책을 끼고 절에 다녔던 자신과의 관계도 드러내었다.
獐項山記 (25)
선친의 무덤이 있는 獐項山의 형세를 자세히 언급하며 지은 記로, 선친의 무덤을 改葬하는 과정을 자세히 언급했다.
石假山記 (27)
자신이 돌을 쌓아 만든 것에 石假山이라 이름짓고 그것을 좋아하게 됨으로서 그 감회를 담아 지은 記로, 活山 아래는 원래 크고 작은 돌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한 환경인데, 그는 이를 이용해 둥글게 돌을 쌓고 그 둘레에 구기자 나무를 심어 그것을 石假山이라 불렀던 것이다.
十二亭記 (28)
活山 왼쪽의 거북의 형상을 한 넓은 바위 위에 十二亭을 지으려고 생각하면서 먼저 그 이름을 짓고 그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은 記이다. 그는 十二를 음양의 成數와 1년 12월 및 12聲 등으로 풀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招鳳庵記 (29)
자신의 거처를 招鳳庵이라 부르고 그 의미와 그렇게 부르게 된 까닭 및 바람을 적은 記로, 鳳凰을 쉽게 볼 수 없겠지만 사람 중에 봉황의 자질을 가진 사람을 얻고 싶어 했다.

卷之六
許貞簡公遺事跋 (1)
知縣 李洛甫가 河陽사람 許貞簡公의 遺事를 순서지어 목판으로 출판하고 관찰사 李給梓가 금전으로 공력을 도운 『許貞簡公遺事』에 쓴 跋로, 仁을 지극히 하고 義를 다한 공적과 복권되는 과정을 언급했다.
守約堂先生家禮輯解跋 (2)
『주자가례』 중 상례와 제례를 모아 간략하게 요약한 『家禮輯解』를 쓴 스승 守約堂의 책에 쓴 跋로, 그것은 朱子書를 뼈대로 삼아 각 家의 같고 다른 말들을 모아 조목마다 註를 덧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書李星湖龍山書院記後 (3)
李瀷이 지은 「龍山書院記」에 쓴 書後로,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도학이 밝지 않게 된다고 하면서 용산서원이 자리한 곳에 묘가 있는 貞武公 崔震立(1568∼1636)이야 말로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라 평했다. 즉 집에서는 효제와 검약을 실행했고 나가서는 임금을 섬겨 충성했으며 관리로 있을 때는 淸白하였다는 것이다.
書鄭義士遺家書詩篇後 (4)
鄭義士가 자신의 집에 남긴 「書詩篇」에 쓴 書後로, 그곳에는 오직 사직을 지키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드러나 있지 한 마디도 家事를 언급하는 말이 없다고 하면서 그의 충성됨과 용기는 일시에 仁을 이룬 군자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극찬했다.
書崔伯源家藏朱子大全後 (6)
崔宗謙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주자대전』에 쓴 書後로, 임진왜란 중에서도 書史에 뜻을 둔 貞武公 崔震立을 기리는 동시에 그 유지를 받들어 후손 崔宗謙이 책을 보관하는 뜻을 칭찬했다.
書二梅堂詩稿後 (7)
王考 寓庵公의 아우 愼明이 남긴 『二梅堂詩稿』에 쓴 書後로, 그의 밝고 빼어난 사람됨과 智計를 지닌 총명함 및 高雅한 뜻을 기렸다.
木枕銘 (8)
목침의 유용성을 언급한 銘으로, 머리를 지탱하여 기울어지지 않게 함으로 밤에 마땅하고 따뜻하지 않아 여름에 마땅하며 수수하여 검소함에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躑躅杖銘 (8)
늙어 다리가 굽고 행동하기가 괴로워 철죽지팡이를 취했다며 지은 銘이다.
烏竹杖銘 (8)
黑竹이 흰머리를 검게할 수 없고 굽은 허리를 곧게 할 수 없지만 붙들고 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지은 銘이다.
梅月祠講堂上樑文 (9)
“시서예의의 학문을 계승할지은정 어찌 外敎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겠으며, 夫婦‧父子의 인륜을 끊고 中權의 도를 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梅月祠講堂의 동남서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한 上樑文이다.
淸風樓上樑文 (10)
樓의 이름은 穆如의 의미에서 취했다고 하는 동시에 임진‧병자란에 공을 세운 貞武公 崔震立을 기리면서 淸風樓의 동남서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한 上樑文이다.
四宜堂重創上樑文 (12)
逸士 李公의 가계와 詩와 禮를 익혀 일가를 이룬 사실 및 그의 효제를 돈독히 한 유풍이 4대에 미쳤다고 하는 동시에 四宜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를 언급하면서 重創하는 四宜堂의 동남서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한 上樑文이다.
贈左承旨孫公旌閭上樑文 (14)
나라가 위급할 때 관직없이 嶺外에서 지키다가 죽어 좌승지로 추증된 孫公의 용감하고 탁월한 충성심을 기리면서 정려문의 동남서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한 上樑文이다.
六宜堂重修上樑文 (15)
六宜堂을 重修하면서 지은 上樑文으로, 그 건물의 기초와 동서남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했다.
花田齋舍上樑文 (17)
花田齋舍를 짓게 된 까닭을 언급하는 동시에 그것의 동서남북‧상하‧후의 지세와 경관을 묘사한 上樑文이다.
社稷壇祈雨文 (19)
4년간 비가 오지 않자 백성의 생명을 불쌍히 여겨 이 혹독한 형벌을 풀어줄 것을 아뢰면서 사직단에 올린 祈雨文이다.
梅月堂金先生奉安文 (19)
매월당 金時習의 높은 풍모를 드러내며 지은 奉安文이다.
祭花溪柳公文 (20)
花溪 柳宜健(1687∼1760)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의 독실한 好學과 부지런한 저술 및 象數‧氣數의 변화에 밝았던 것 등을 자기와 비교하며 기린 祭文이다.
祭守約堂先生文 (20)
수약당 南濟明의 효제와 믿음있는 사귐, 빼어나고 아름다운 자질과 온화한 기질, 사물의 이치와 고금의 변화에 통달한 것, 그리고 수기치인의 도를 다한 것과 후생들을 학문으로 인도한 것 및 단정하고 엄숙한 행동거지 등을 기리며 지은 祭文이다.
祭李士仰文 (22)
妹兄 李斗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슴아파하면서 남기고 간 가정과 자신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의 올곧은 語黙動靜을 기린 제문이다.
祭李圖萬文 (23)
李運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祭文으로, 중간에 그의 志業이 끊겨 공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아쉬워했다.
祭伯兄府君文 (24)
“하늘이 우리 집을 돕지 않는 구나!”라며 큰 형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면서 지은 祭文으로, 가난하면서도 전적으로 부모를 모신 까닭에 위가 빈 것 때문에 병을 얻었다며 하늘의 뜻을 의심하고 있다.
祭宗姪上舍子初-景復-文 (25)
빼어난 재주 및 큰 덩치와 위용을 가져 미래를 기대해도 될 宗姪 景復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며 지은 祭文이다.
浦項防提碑銘 (25)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豊原君 趙顯命(1690∼1752)이 浦가까이에 큰 창고를 지어 곡식을 축적함으로서 경상남‧북도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지 않게 한 공을 기리는 동시에 지난 가을에 큰 물이 넘쳐 피해를 보았으므로 그것을 보수하게 한 공을 기린 碑銘이다.
烈婦金氏旌閭碑銘 (26)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던 金鍊의 아내 金氏가 죽음으로 자식을 지키려고 한 공을 기린 碑銘으로, 김씨가 난을 만나 행한 행적과 그 남편의 활약상 및 자신이 비명을 쓰게 된 까닭을 언급했다.

卷之七
觀瀾李先生墓誌銘 (1)
觀瀾 李承曾(1515∼1599)의 지극한 효성과 선후가계 및 생몰연대와 행적을 적은 墓誌銘이다. 여기서는 후대가 그를 기념하여 觀瀾書院을 지은 것과 旌閭門이 내려진 것 및 낡은 旌閭版閣을 府尹 趙明鼎(1709∼1779)이 다시 쓴 것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本貫은 月城이고, 아버지는 參奉 季幹이고, 아내는 月城 金氏이며 슬하에 4남을 두었다. 44세에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전심으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그 때문에 寢郞과 宗簙典籖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通政大夫行求禮縣監崔公墓誌銘 (4)
求禮縣監 崔東彦(1592∼1672)의 빼어난 용모와 文詞 및 純直하고 참된 성품과 돈독한 효를 기린 墓誌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벼슬 및 생몰연대를 언급했다. 字는 聖求이고 본관은 月城이며 號는 白沙이다. 아버지는 宗繼이고 어머니는 熊川 朱氏이다. 슬하에는 후처 碧珍 李氏에게서 1남 1여를 두었다. 그리고 寒岡 鄭逑(1543∼1620)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司馬試에 합격한 이후 인조 때 孝廉으로 穆陵郞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했다. 그 후 金吾都事와 求禮縣監을 역임했다.
崔進士墓誌銘 (6)
崔宗嵂(1724∼1773)의 어질고 교만하지 않은 성품을 기린 墓誌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많은 병으로 학업에 전념하지 못한 사정 등을 언급했다. 字는 泰一이고 아버지는 通德郞 承烈이며 어머니는 月城 孫氏이다. 아내는 載寧 李氏인데, 자식이 없어 族兄 宗萬의 말째를 양자로 들였다.
亦樂堂金處士墓誌銘 (7)
金惟一(1683∼1750)의 위기지학과 실질을 중시하며 좋아하는 것에 매진한 삶을 기린 墓碣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스승과 그의 학문적 지향 등을 언급했다. 字는 子中이고 아버지는 休이며 寓庵公 南九明에게서 배웠다. 슬하에는 전처 月城 崔氏에게서 2남을 두었고, 後聘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다. 평소 노둔하면서도 질박하여 소학에 착념하였고, 또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배운 바를 실천에 옮겼다.
崔君翼墓誌銘 (10)
崔宗翰(1713∼1760)의 樸實한 성품과 지극한 효우를 기린 墓碣銘으로, 아버지는 慶聃이고 어머니는 月城 李氏이며 花溪 柳宜健(1687∼1760)에게서 배웠다. 슬하에는 驪江 李氏에게서 2남을 두었다.
高祖考安分堂進士府君墓誌 (12)
高祖 南佶(1595∼1660)의 총명함과 숙성함 및 대범하면서도 중후한 자질을 기린 墓誌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행적을 적었다. 字는 正卿이고 아버지는 慶薰이며 어머니는 載寧 李氏이다. 슬하에는 寧海 申氏에게서 2남을 두었다.
朝考處事府君墓誌 (13)
祖考 南宇明(1648∼?)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을 기린 墓誌로, 英陽 南氏가 영해에 들어와 산 경위와 그가 태어난 해 및 후대를 언급했다. 字는 鳳瑞이고 아버지는 從士郞 尙周이며 어머니는 漢陽 趙氏이다. 슬하에는 寧海 申氏에게서 2남을 두었으나 둘 다 후사가 없어 장자 國先은 公의 말째 아우의 장자의 둘째 아들 龍萬을 양자로 삼았다.
本生考通德郞府君壙記 (15)
生父 南國衡(1687∼1745)의 총명하고 영특한 자질과 원대한 포부를 기린 壙記로, 그의 생몰연대와 선후가계 및 장지와 移葬地를 적었다. 그리고 자신이 從祖 叔父에게 입양되었음을 언급했다. 字는 舜會이고 아버지는 順天府使 九明(1661∼1719)이며 어머니는 李氏이다. 슬하에는 驪江 李氏에게서 5남 2녀를 두었다.
亡弟槐院正字君墓誌銘 (17)
35세로 요절한 넷째 아우 南濟萬(1712∼1746)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동시에 옥을 깎은 듯한 그의 맑고 빼어난 재주와 과거급제 및 그의 갑작스러운 병과 죽음을 언급했다. 字는 汝兼이고 아버지는 通德郞 國衡이다. 딸 하나만 두었기 때문에 셋째 형의 세 번째 아들 景樞를 후사로 삼았다.

亡室宜人任氏墓銘 (18)
아내 宜人 任氏(1710∼1743)의 생몰연대와 아버지와 자녀 및 결혼과 매장지를 언급했다. 아버지는 처사 榦世이고 14세에 南氏에게 시집왔다.
贈嘉善大夫刑曹參判金公墓碣銘 (19)
金虎(1534∼1592)의 무과급제와 임진왜란 때의 공적 및 선후가계를 언급한 墓碣銘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字는 德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叔麟이고 어머니는 金氏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많은 공적을 세워 釜山僉使에 제수되었다가 순절했는데, 1758년 영조 34년에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슬하에는 烏川 鄭氏에게서 3남을 두었다.
通訓大夫蔚珍縣令崔公墓碣銘 (20)
崔國成(1626∼1684)의 청렴한 덕을 기린 墓碣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과거와 벼슬, 그리고 매장지를 언급했다. 본관은 月城이고 아버지는 承訓郞 東老이며 어머니는 肅川都護府使 李景漢(1560∼1650)의 딸이다. 1651년에 무과에 합격한 이후 軍器主簿‧彦陽縣監‧監察‧知旌義縣‧蔚珍縣令‧求禮縣監 등을 역임했다. 슬하에는 玄風 郭氏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月城崔公墓碣銘 (21)
崔達濟(?∼1762)의 온화한 용모와 仁愛한 성품을 기린 墓碣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죽은 해 및 장지 등을 언급했다. 字는 兼之이고 아버지는 南衡이며 어머니는 烏川 鄭氏이다. 슬하에는 驪江 李氏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申宅誠墓碣銘 (23)
병으로 요절한 申宅誠(1741∼1774)의 총명함과 성실하고 어진 성품 및 지극한 효제를 기린 墓碣銘으로, 본관은 平山이고 字는 子純이며 아버지는 逸士 光翼이고 어머니는 達成 徐氏이다. 슬하에는 4녀만 있어 再從 宅東의 장자 胃應으로 후사를 이었다.
通德郞崔公墓碣銘 (25)
崔履基(1651∼1730)의 충효와 총명함을 기린 墓碣銘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모두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언급했다. 字는 道由이고 아버지는 國鎭이며 어머니는 烏川 鄭氏이다. 슬하에는 月城 李氏에게서 1남 3녀를 두었다.
再從兄處事公墓碣銘 (26)
함께 자란 再從兄 南泰萬(1651∼1730)의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문과 집안일을 잘 돌보아 명성이 자자했다는 사실과 질직한 성품 및 仁厚한 처신을 기린 墓碣銘으로, 그의 행적과 선후가계 및 생몰연대를 언급했다. 아버지는 處士 國耆이고 어머니는 完山 柳氏이다. 슬하에는 聞韶 金氏에게서 3남 3녀를 두었다.
花溪柳公行狀 (28)
柳宜健(1687∼1760)의 담력과 지략을 갖춘 아름다운 자질과 총명함 및 性理에 기반한 학문과 밝은 易學을 기린 行狀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생몰연대 및 학문과 평소의 행적을 언급했다. 本貫은 瑞山이고 字는 順兼이다. 아버지는 起瑞이고 어머니는 鶴城 李氏인데, 季父 泰瑞가 자식이 없어 후사로 갔다. 슬하에는 前配 月城 崔氏에게서 2남을 두었는데 장남 友井은 형의 후사가 되었다. 그리고 仁川 崔氏에게서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이 중 장녀는 자신(南龍萬)에게 시집왔다고 밝혔다.
伯從祖考兵曹佐郞府君行狀 (32)
伯從祖 南老明(1642∼1721)의 독실하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은 자질과 효우 및 아담한 정취 등을 기린 行狀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과거 및 벼슬과 행적을 언급했다. 본관은 英陽이고 아버지는 尙周이며 어머니는 漢陽 趙氏이다. 1684년에 經에 밝아 과거에 급제했고, 그 후 國子‧春官‧幽谷郵丞‧거창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거창현감 당시(1695년) 온 나라가 대기근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백성들을 구휼했다.
本生祖考順天都護府使府君行狀 (35)
祖考 南九明(1661∼1719)의 기개와 도량 및 총명함 등을 기린 行狀으로, 그의 선후가계와 과거 및 벼슬과 행적을 언급했다. 168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3년에 經에 밝아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남쪽으로 鷄林으로 옮겨 寓庵이라 호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伯兄 老明의 권유로 벼슬길에 올라 郵丞‧濟州通判‧順天府使 등을 지냈다. 제주통판에 재임할 때는 큰 기근에 처한 백성들의 구호에 전념하여 많은 찬사를 받았고, 또 백성들은 순천부사로 있을 때의 그의 공적을 기려 銅碑를 세우기도 했다. 본관은 英陽이고, 字는 箕瑞이며, 號는 寓庵이다. 아버지는 尙周이고 어머니는 漢陽 趙氏이며, 슬하에는 月城 李氏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活山先生語錄
둘째 아들 景羲가 편집한 것으로 아버지가 남긴 말들을 정리한 것이다. 모두 38면에 걸쳐 162조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중에는 누군가가 묻고 그것에 남용만이 대답한 것이나 남용만이 묻고 누군가가(景羲 등) 그것에 대답한 문답식이 34조목 포함되어 있는데, 주로 철학(유학과 성리학)이나 경전 및 역사 등 학술적인 의문들을 다루고 있다. 또 이 밖에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평일의 기거동작은 물론이고 학술‧금언‧세태‧학문방법‧가르치는 방법‧마음공부‧喪禮法‧改葬방법‧廬墓살이‧제사법‧의식주‧자녀교육‧독서법‧처세법‧詩를 보는 방법‧역사‧작문법‧인물평‧시감상‧불교에 대한 평가 등 다양하다.
活山先生文集附錄
여기에는 장자 景采가 쓴 行狀(1-5면)과 洪良浩(1724∼1802)가 지은 墓碣銘(5-8면) 및 縣監 李憲洛 등이 지은 41수의 挽詞(8-22면)가 수록되어 있다. 아래는 만사를 지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즉 縣監 李憲洛(1718∼1791), 持平 李萬運(1723∼1797), 判書 洪良浩(1724∼1802), 判書 李獻慶(1719∼1791), 監司 金翰東(1740∼1811), 大司成 睦萬中(1727∼?), 李憲烈, 金霽行, 參判 李鼎揆(1735∼?), 進士 金道行, 進士 李鼎宇, 進士 柳榮魯, 鄭一鑽, 李堯中, 李舜中, 崔宗謙, 佐郞 李漢龍, 進士 申光五, 生員 鄭熺, 崔達兼, 申光翼, 校理 李顯靖(1721∼1789), 李鼎宅, 李東龜, 參奉 權應度, 趙運道, 監役 李樹仁(1739∼1822), 正言 崔璧(1762∼1813), 生員 鄭一銓, 孫升九, 生員 孫憙一, 右尹 姜碩龜, 縣監 權應奎, 掌令 李鎭宅(1738∼1805), 進士 孫國濟, 李養吾, 鄭忠弼, 進士 黃斛, 三從弟 進士 南丈萬, 三從弟 南達萬, 三從弟 南正言 基萬(1730∼1796)이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