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세폐사(歲幣使)

서지사항
항목명세폐사(歲幣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사대외교(事大外交), 정기(定期) 사행(使行)
관련어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세폐미(歲幣米), 정조사(正朝使), 정축화약(丁丑和約), 천추사(千秋使)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병자호란 이후 해마다 청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파견한 사절(使節).

[개설]
국초 이래로 명나라와의 사대(事大) 관계에서 동지(冬至), 설날인 정조(正朝), 황제의 탄신일인 성절(聖節), 황후나 황태자의 탄신일인 천추(千秋)에 연간 4차례 정기 사행(使行)이 있었다. 1637년(인조 15) 이후 천추사의 제도는 없어지고 대신 공물인 세폐(歲幣)를 바치는 세폐사(歲幣使)가 새로 생겼다. 그러다가 청나라는 1645년 베이징을 장악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강화(講和) 조건을 완화하여 3번 즉, 동지·정조·성절의 절기 사행과 세폐사를 통틀어서 1번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담당 직무]
인조반정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광해군 말년 때와 같이 평안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나라 병력에게 군량을 비롯한 각종 지원품을 공급하던 것을 중단할 수 없었다. 후금은 1627년에 병력 3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것은 자신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넘어 진격할 때 조선이 후방을 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무장(武將) 모문룡(毛文龍)을 조선이 지원하는 것을 중단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후금과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은 뒤, 조선은 가도 지원을 끊을 수도 없었고 후금이 요구하는 세폐를 감당하기에도 힘겨운 실정이었다.

후금은 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뒤 여전히 명나라를 섬기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1637년 정축화약(丁丑和約)을 맺은 이후로 청나라의 세폐는 막대한 분량이었다. 1639년 10월에는 세폐미(歲幣米)를 봉황성(鳳凰城)까지 운반해 갔으나 청나라 호부(戶部)에서 점검해서 늦추는 일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에서 2개월이나 시한을 끌어서 인마(人馬)가 많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 달 뒤에는 조선에서 보낸 세폐를 금 대신 은으로 보냈다가, 청나라의 요구로 금으로 다시 보냈다.

1640년 3월 충청도에서 출발한 세폐선(歲幣船) 6척이 평안도 영유현(永柔縣) 해안에서 전복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도 청나라가 세폐선 출발을 독촉하여 평안도 해안에서 난파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청나라는 인조가 단 몇 년 만에 성의를 잃어 버렸다고 질책하면서 고의적으로 수군의 배가 좌초된 것이라며 원망하였다. 그러자 평안병사 임경업(林慶業)이 혼자 가서 전후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자원하는 형편이었다.

정축화약 이후 조선의 왕세자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심양(瀋陽)에 머물렀다. 1644년 청나라는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소로 은화 5천 냥을 요구하고 이듬해 봄에 다시 5천 냥을 보내라고 강요하였다. 청나라의 역관으로서 여러 차례 조선 정부에 무리하게 세폐를 요구해서 곤경에 빠뜨렸던 정명수(鄭命壽)는 소현세자를 압박하여 세폐를 독촉하였다. 이에 인조는 일시적으로 세폐 마련을 중단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효종대 이후로 청나라는 사문(査問)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의 내부 실정을 예의 주시하였다. 조선 정부도 현종 말년부터 약 10여 년에 걸쳐 청나라에서 일어난 오삼계(吳三桂)의 난에 비상하게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숙종 재위 중반기에는, 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 조총이 지급되었으나 오랫동안 쏘는 방법조차 모른 채 총이 녹슬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1703년(숙종 29) 이후에는 왕이 주도해서 북한산성을 축조하려는 시도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변천]
세폐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의 3사(使)를 갖추고, 당상통사(堂上通事) 이하의 역관(譯官)·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畫員)과 함께 대략 40여 명이 사행을 구성하였다. 청나라 관부에서는 인원을 30명으로 줄이도록 하였으나 대략 35명 이하로 줄지는 않았다.

정기 사절이 1회로 통합되기는 하였으나, 명목은 그대로 남아서 한 번 사행에 정기 사행이든 비정기 사행이든 몇 가지 목적을 묶어서 출발하였다. 게다가 실상 청나라 사행의 횟수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서 독촉이 없다면 정기 사절의 명목도 줄여보려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청나라의 의도를 거슬려서 사신 행차를 약소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정기·비정기를 막론하고 몇 가지 명목을 아울러서 파견하되 세폐의 요구가 거셀 경우에는 세폐만을 전담하는 역관을 추가로 더 보내서 부담을 완화하려고도 하였다.

인조대에 정축화약을 맺고 청나라의 감시가 극심했을 때는 세폐사가 준비하여 간 마필이 200여 필이었다. 그러던 것이 1820년대에 이르면 인마가 대폭 줄어서 50필을 넘지 않았다. 인마를 조달하는 비용은 의주부(義州府)에서 관할하던 모자(帽子) 세금으로 충당하고자 하였다. 연행이 연속해서 발행할 경우에는 여유가 있는 다른 사행의 모자 세금에서 당겨쓰고 추후 갚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집필자] 이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