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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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興禮門)

서지사항
항목명흥례문(興禮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관련어광화문(光化門), 금천교(禁川橋), 덕양문(德陽門), 오문(午門), 유화문(維和門), 정문(正門), 홍례문(弘禮門)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경복궁 근정문 남쪽에 있는 외전의 정문.

[개설]
창건 당시에는 오문(午門)이라 했으며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문의 이름은 정문(正門)이었다. 1426년(세종 8)에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勤政殿)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라고 하였다[『세종실록』 8년 10월 26일]. 고종대에 경복궁 중건 시 문 이름을 흥례문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의 좌우·동서쪽의 행각으로 둘러싸인 내정(內廷)에는 금천(禁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그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고종실록』 4년 11월 8일].

[위치 및 용도]
흥례문은 근정문(勤政門)의 남쪽에 있으며 흥례문 좌우 행각과 동서 행각은 근정전의 외행각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근정전에서 행하는 의례에서 홍례문(弘禮門) 내정은 참례자들이 근정전 내정으로 나아가기 전에 대기하는 문외위(門外位), 막차(幕次)였다. 근정문을 사용하는 조참(朝參) 의례에서는 의식의 거행 장소가 홍례문에서 근정문까지의 내정이 된다. 금천과 영제교가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공간이 구분되는데 동쪽은 문관, 서쪽은 종실과 무관이 등급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섰다. 품계에 따라 2품 이상은 금천의 북쪽에, 3품 이하는 그 남쪽에 자리하였다.

고종대에 중건된 흥례문 행각에는 각종 관서가 있었는데, 병조(兵曹) 소속으로 궁내외 행사와 왕의 거둥 시에 주변 정리와 이동 수단을 관리하는 부서였다. 남행각의 서쪽에는 정색(政色)과 마색(馬色)이 있고 동쪽에는 결속색(結束色)이 있다. 동행각에는 동궁의 정당인 계조당(繼照堂)으로 통하는 덕양문(德陽門)이 있고, 행각의 중간쯤 금천이 관통하는 곳에는 어구(御溝)에 돌기둥을 세워 물 위에 지은 수각(水閣)이 있다. 서행각에는 내병조(內兵曹)가 있고 동행각과 같이 금천 위 부분은 수각이 있으며 차일과 휘장을 관리하는 배설방(排設房)이 있고 그 북쪽에 궐내 각사와 수정전 권역으로 통하는 유화문(維和門)이 있다. 유화문은 왕이 대내에서 흥례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갈 때 거치는 문으로 흥례문→유화문→수정전(修政殿)의 숭양문(崇陽門)→영화문(永和門)→수정문(修政門)을 통해 대내로 들어가는 문로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유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에는 어도가 깔려 있다.

흥례문 안 내정의 금천에 놓인 다리는 세종대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금천교는 궁궐에서 외전 바깥쪽에 위치하는데, 지형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앞[錦川橋], 창경궁 홍화문 안[玉川橋], 그리고 경희궁과 덕수궁에도 정문 안쪽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경복궁의 다리를 금천(錦川)이라 하며, 영제(永濟)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고종대에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금천교(禁川橋)라고 하였다. 『고종실록』과 고종대의 『승정원일기』에는 영제교라는 이름을 사용한 용례가 없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 창건 당시 기록에 “정전의 전문(殿門)과 오문(午門) 사이의 뜰 가운데에 석교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하여 처음부터 금천교와 석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대에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그린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에는 흥례문 행각이 그려져 있지 않고 금천교에 있는 수각은 독립된 정자의 모습이다. 고종대에 중건하면서 근정문 바깥쪽으로 외행각을 둘러 금천교가 있는 흥례문의 내정을 만들었다.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흥례문과 행각을 철거할 때 금천교[영제교]를 해체하여 그 부재를 조선총독부 박물관 서쪽에 모아 두었다고 한다. 이것을 1950년대에는 수정전 앞에 설치했다가 1970년대에 건춘문(建春門) 안쪽에 다시 설치하는 등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2001년에 흥례문과 행각, 금천교를 현 위치에 복원했다.

[형태]
고종대에 중건된 흥례문은 근정문과 규모와 양식이 같다. 중층의 문루이며 상층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도리 칸이 3칸, 보칸이 2칸이며 다포형식에 하층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2출목씩이다. 『궁궐지(宮闕誌)』에 근정문과 같은 규모로 기록되었고, 고종대 중건 시에도 같은 시기에 공사를 진행하여 입주, 상량이 이루어졌으므로 현재의 건물은 근정문을 근거로 하여 2001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금천교의 하부는 홍예를 두 개 틀고 상부는 돌로 귀틀을 설치하였으며 너비가 33자(약 10m)이고 길이는 43자(약 13m)에 달한다. 중앙에는 어도가 있다. 돌난간의 엄지기둥 머리에는 동물상을 조각하였고 돌난대는 팔각형의 장대석이다. 엄지기둥 사이에는 하엽동자를 세워 돌난대를 받고 있다. 다리 옆의 어구 석축 위에는 한 면에 한 마리씩 모두 4마리의 석수(石獸) 조각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던 중 홍례문의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과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을 정한 직후에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이름 변경을 건의했다. 본래는 홍례문이라고 하려 했으나 청나라 건륭황제의 이름이 홍력(弘歷)이었으므로 이름자를 피하기 위하여 홍(弘)을 흥(興)으로 바꿀 것을 건의한 것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홍례문의 이름을 흥례문으로 바꾸었다. 혹시 청나라 칙사가 왔을 때 보고 흠을 잡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 흥례문권역중건공사보고서』, 문화재청, 2001.
■ 조재모·전봉희, 「고종조 경복궁 중건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138, 2000.

■ [집필자] 이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