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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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청사(奏請使)

서지사항
항목명주청사(奏請使)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고명장(告命狀), 시호(諡號), 주문사(奏聞使), 진주사(陳奏使)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의 비정기적인 사절로, 중국에 어떤 사안을 요청할 때 파견되던 사절.

[개설]
주청사는 고려나 조선시대 때 정치적으로나 외교상으로 중국에 요청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파견되었다. ‘주청사’는 사안(事案)에 따라 각종 별칭이 있지만 약칭(略稱)하여 ‘주청사’라 하였다.

주청사는 조선에서 왕위를 승습할 때 중국의 허락을 의미하는 고명장(告命狀)을 청하거나, 또는 세자와 왕비를 책봉하는 일이나, 또는 조선 조정이나 궁중에서 필요한 물화를 조선에서 매매할 수 있도록 요청하거나, 과중한 공물 물량을 감면을 요청할 때, 그 밖에 대행왕의 시호(諡號)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할 때 파견되었던 사절이다.

주청사는 주문사(奏聞使) 및 진주사(陳奏使)와 그 성격이나 기능이 비슷하다. 다만, 주청사는 어떤 내용을 알리고 그에 대한 답변을 청하는 성격이 강한 반면, 주문사와 진주사는 단순히 어떤 사건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많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주청사와 진주사는 조선후기 대청 관계에서도 지속적으로 파견되는 사절이지만, 주문사는 대청 관계에서는 파견되지 않는 사절이다.

[담당 직무]
주청 사행의 주요 내용은 대체로 고명인신(誥命印信), 금은면공(金銀免貢), 군사 지원, 선대왕의 시호와 대행왕의 승습, 종계에 대한 변개 등을 청하는 것이었다.

주청사의 정·부사는 정3품 이상의 대신이나 종실에서 1품계 상위로 차임되었다. 서장관은 4품에서 6품관 사이에서 1품계 임명되었다. 이들 삼사(三使) 이외의 정관 대부분은 사역원에서 차임되었다.

사절의 출발에 앞서서 20~30일 전에 승문원에서 표·전문이 작성되고 호조에서는 예물을 준비하였다. 사행이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는 날, 청 예부의 회동관(會同館)에 그 도착을 통보하면, 회동관의 역관이 이를 영접하였다. 사행이 북경에 체류하는 기간은, 명대에는 40일로 제한되었으나, 청대에는 약 60일간까지였다. 북경에 머물면서 조회에 참석하거나 황제를 알현하는 것 이외에도 사안에 따라 관련 관리들을 접촉해 외교 현안을 해결하였다.

가져간 예물로는 황제에게는 여러 색깔의 모시와 명주, 여러 색깔의 화석(花席), 백면지(白綿紙) 등을, 황후에게는 여러 색깔의 모시와 명주·화석 등이 있었다.

[변천]
주청사는 가져간 표·전문의 내용에 따라 ‘청조하의주사(請朝賀儀注使)’, ‘청육로사(請陸路使)’, ‘청시청습사(請諡請襲使)’, ‘청자제입학사(請子弟入學使)’, ‘청탐라토벌사(請耽羅討伐使)’, ‘청표류인송환사(請漂流人送還使)’, ‘청종계개정사(請宗系改正使)’, ‘청왕후고명사(請王后誥命使)’ 등이나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변무사(辨誣使)’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이는 모두 주청사의 별칭이었다.

주청사의 정·부사를 차임하는데 사안(事案)에 따라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예로 들면, 일반 물품을 요청할 때보다 왕이나 왕비, 세자의 책봉이나 종계변무, 군사 지원 등으로 주청사를 파견할 때는 최고 의정인 1품관을 파견하는 것이 상례였다.

사절의 구성도 시기와 사안에 따라 차이는 있었다. 대체로 명대는 정사·부사·서장관·통사·타각부·압물관·군관·이마(理馬)·압마관·양마(養馬)·의원 등 정관(正官)과 마부·노자 등 종인(從人)으로 구성되었다.

청대는 정사·부사·서장관·당상관 각 1명, 상통사 2명, 질문종사관 1명, 압물종사관 8명, 청학신체아 1명, 의원·사자관·별견어의 2명, 별계청 1명, 가정압물관 2명, 군관 8명, 우어별차 2명 등 정관 34명과 마부·노자·인로 등 종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별계청(別啓請)은 필요에 따라 2명으로 가정되기도 하였고, 가정압물관(加定押物官) 2명은 1697년(숙종 23)에 일시 1명으로 감원되었지만, 1707년(숙종 33)에 복구되기도 하였다.

[의의]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에 주청사의 파견 명목은 고명인신(誥命印信), 국호 택정, 금은면공(金銀免貢), 군원(軍援), 선대왕의 시호와 대행왕의 승습, 종계에 대한 변개, 약재나 관복 하사 등을 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청사의 파견만을 두고 볼 때는 비굴할 정도의 외교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보장받고 동시에 중국의 선진 문물 수입과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사행을 통해서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주청사의 파견만을 두고 사대적 굴욕적 외교 형식으로 논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동북아의 의례적인 외교관계, 더 나아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다방면에 걸쳐 거시적 시각으로 보면, 주청사를 비롯한 각종 명목의 사절 파견을 바탕으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실리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구진, 「조선전기 한중관계의 시론-조선과 명의 사행과 그 성격」, 『홍익사학』4, 홍익사학회, 1990.12.
■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연구-대명사신과 명 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 1998.10.
■ 박성주, 「조선초기 遣明 使節에 대한 一考察」, 『경주사학』 19, 경주사학회, 2000.12.
■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8.

■ [집필자] 박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