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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의 상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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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조선공산당의 상황에 대하여
· 키워드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 대표주제어조선공산당
· 설명문조선 내 공산당 현황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대표표제어: О положении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в Корее
산출물명: ЦАМО,ф.32,оп.11306,д.682,лл.269-277.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в Корее
면수: 9



번역문


조선공산당의 상황에 대하여
(이 자료는 서류들 및 지방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담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붉은 군대가 북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조선으로부터 정치상황의 복잡성과 조선공산당에서 전개되고 있는 큰 규모의 조직투쟁 및 당 내부투쟁에 대한 정보가 보다 자주 입수되었다. 현지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성원으로 구성된 정치일꾼 그룹이 활동하였다. 연해주군관구 정치지도국 부국장 대좌 바빌로프(Вавилов) 동지, 정치지도국 제7과장 중좌 메클레르(Меклер) 동지, 붉은 군대 정치지도부 제7국 부국장 소장 사포즈니코프(Сапожников) 동지, 제25군 정치과장 대좌 그로모프(Громов) 동지. 다음과 같이 판명되었다. 소련과 일본의 전쟁이 개시되던 시점까지 조선에 조성되었던 정치상황은 일체의 혁명운동에 대한 탄압 강화, 일본 제국주의 측으로부터의 억압과 매수 강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생각을 아주 소소하게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북조선이 해방되는 순간까지는 통일적으로 조직된 공산당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2개의 당 그룹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 각각은 자기의 중앙위원회를 보유하고 있다. 박헌영 중앙위원회 비서가 중심인 경성콤그룹(Сеульская комгруппа). (박헌영은 1926년에 조선 공산청년동맹 비서였으며, 같은 해 7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후에 감옥에 수차례 들어갔으며, 소련으로 갔다. 소련을 떠나 상하이로 갔으며, 그곳에서 지하사업에 참여하였다. 1933년에 체포되었고 1939년에 출옥하였다. 그때 이후로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현재 서울의 조선공산당 위원회 비서로 활동하고 있다. “경성콤그룹”은 1945년 8월 말에 자신을 조선공산당으로 선포하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하였다. 인민공화국의 선포,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8시간 노동제, 의무교육, 일본인 및 조선인 친일분자들이 소유한 모든 토지와 공장의 국유화, 불평등한 조세체계와 투기꾼에게 지불하는 이자지급체계의 청산 등. 조선공산당(경성콤그룹) 중앙위원회는 발표문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8월 테제’라고 한다.
(첨부-2 참조)를 자기 사업의 원칙으로 설정하였다. 이 발표문은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가 서명한 후인 8월 20일에 서울에서 발표되었다. 이 발표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계단에 놓여 있다.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고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토지 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농민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또한 정부의 정책에 참여하는데 있어 혁명조직들의 권리, 공산당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8시간 노동제의 실현, 인민대중의 삶의 신속한 개혁 등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토지, 산, 목재, 지하자원, 공장, 운수, 체신, 은행 등을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서 몰수하여, 그것들을 국유재산으로 전변시키고 그것들을 국유화를 통해 국가에 넘겨주어야 한다. 나라의 자금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여성들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수입에 의거한 조세제도를 실현해야 한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다음을 기본 과제로 제기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노동계급과 농민의 진정한 지도자로서 인민들 앞에 나선다. 따라서 모든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만들기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이는 지금 단계에서 첫 번째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우리는 조직된, 그리고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과 연결되어 있는 분파운동을 제거해야 하며, 그들을 타도하기 위해 그들을 상대로 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8월 20일 발표문에서).
당(경성콤그룹) 중앙위원회는 현지에 당조직들을 창설하기 위한 일련의 조직사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매우 성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도에 박헌영 비서가 서명한 위임장(첨부 – 13)을 가진 자기의 전권대표들을 파견하였다. 1945년 9월 초에 당 중앙위원회는 황해도, 평안남도, 평양(평성) 시와 여타 군들에 몇 개의 영향력 있는 당조직들을 만들었다. 황해도에는 큰 당조직이 창설되었고, 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위원회 비서에는 최경덕이 임명되었다. (최경덕은 1909년에 출생하였으며, 사회성분은 노동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에 콤소몰에 가입하였다. 지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그로 인해 1934년에 체포되어 1945년 8월 17일까지 감옥에 있었다). 최경덕은 1945년 8월 30일에 공산당에 공식적으로 가입하였다.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구성원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지만, 중앙위원회 구성원으로 아마도 박헌영, 김삼용, 리주하, 최경덕 및 여타 사람들(첨부 – 6)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위원회 구성원들은 젊고 이론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당조직이건 위원회 구성원이건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8월 17일 이후에야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사업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조직 성원임을 나타내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 한명의 공산주의자도 자기가 공산당원이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도위원회들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의 사업지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중앙위원회는 평양시와 평안남도에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당조직을 구성하였다. 당조직에 12개 군 당조직이 통합되었으며, 그 가운데 10개 군에 당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김용범이 비서 직책을 가지고 도 당위원회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용범은 1901년에 출생하였다. 1932년에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을 졸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코민테른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허이순(Хе И Сун)이 도위원회 선전선동국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허이순은 1903년에 출생하였다. 중등교육을 받았다. 혁명활동으로 인해 3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진시우(Тин Си У)가 정치국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진시우는 1895년에 조선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소련에 거주하였다.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조선의 감옥에서 10년 동안 있었다.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박정애가 여성국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박 베라(Пак Вера). 1907년 러시아에서 출생하였다. 1932년까지 소련에 거주하였다. 1932년에 프로핀테른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2차례 체포되었다. 1930년부터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당원이다.
위에 열거한 공산주의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도위원회는 개별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설립되었으며, 아무도 선출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승인을 받지 않았다. 위원회는 자기의 사업에서 일련의 실책을 저질렀고, 현재도 저지르고 있다. 붉은 군대가 들어온 초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즉각적인 소비에트정권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무장대들은 도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많은 수의 창고와 기관 등을 장악하였다.
평안남도 당위원회는 직업동맹과 사회단체들을 조직하는데 있어 조선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많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400명으로 구성된 탄광직업동맹이 조직되었다. 금속노동자, 식료공업일군 등등의 직업동맹이 조직되었다.
위원회는 간부 양성을 위해 정치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곳에서 500명 이상이 교육받고 있다. 박헌영을 필두로 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단일의 조선공산당을 통합 및 창립하기 위한 많은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앙위원회가 서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박헌영과 중앙위원회의 실제 활동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으며, 중앙위원회의 구성원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헌영이 이끌고 있는 중앙위원회의 실제 활동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1945년 9월에 이른바 서울전국대회(обще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съезд в гор. Сеуле)에서 제기한 중앙인민위원회라고 불리는 정부를 박헌영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와 같은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경성콤그룹 및 그 중앙위원회와 함께 조선에는 이른바 “스탈린그루빠(Сталинская группа)”와 비서인 이영이 주도하는 스탈린그룹의 중앙위원회가 병행적으로 존재 및 활동하고 있다. (이영은 1920년부터 콤소몰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에 당에 가입하였다. 1929년에 체포되어 1933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이후 재차 체포되어 1년 더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서울에 있는 석탄회사 사무원으로 복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스탈린그루빠”이 자기를 조선공산당이라고 선포하였고, 같은 해 8월 20일에는 이 당이 위로부터 조직되었고 대중과의 충분한 연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판단 하에 이른바 중앙위원회에서 당을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비서인 이영은 중앙위원회의 그와 같은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자기를 중심으로 젊은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열성자들로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열성자들에 의지하면서 자기의 분열활동을 진행하였다. 중앙위원회 선임 당원들이 대열에서 벗어나던 당시 이영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새로운 당원들을 중앙위원회로 끌어들였고, 자기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명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의 그룹으로 통합된 공산주의자의 수가 1,000명에 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영 그룹은 정해지고 명백하게 표명된 당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적이고 허황하며 정치적으로 유해한 이영의 관점은 조선의 정세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a) 제2차 세계대전은 계급전쟁이다. 요컨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전쟁이다. b) 조선에서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즉시 전환할 수 있다. c) 공산당은 불법적인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 이영은 실제로 이와 같은 정책을 실행하고 있으며, 만약 이영이 대량 살포한 삐라들(“용감하게 전진하자” (첨부 - 15) 및 “조선민주당 지도자들의 발언에 대한 항의” (첨부 – 16))의 내용을 이영 집단의 강령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허황된 강령이고 정치적으로 해로운 강령이며, 삐라 “용감하게 전진하자”에 수록된 일부 내용은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코민테른이 해산된 후 소련공산당이 모든 지도 및 연락사업을 시행하였다. 소련공산당은 특히 조선 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몇몇 동지들은 자기를 ‘순수한 사조’로 칭하였고(총정치노선의 결정), 다른 사람들은 ‘흐릿한 사조’라고 칭하였다.” 이 유해한 삐라는 이영에 의해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이것을 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은 당연히 안된다. 이영 그룹은 대중 속에 조직적으로 뿌리를 박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영을 지지하는 새로운 당원들을 모집하고 지방 당조직들을 설립하는 등의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영은 서울에 시공산당(Горкомпартия)을 설립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기구에는 약 250명의 당원이 결집되어 있다고 한다. 남조선 각도에서 자기의 대표들을 통해 도당위원회를 조직하고 있다. 이영이 이끌고 있는 당중앙위원회는 서울에서 1,000부를 발간하는 주간신문 “대중(Масса)”을 발행하고 있다(첨부 - 17). 신문 편집장은 이영이다. 이영은 무장봉기를 위한 전투성원을 양성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이를 목적으로 이영은 군사정치학교를 조직하기 위해 서울에서 멀지 않은 북조선의 철원으로 10명의 그룹을 파견하였다. 그룹은 무전기를 지급받았으며, 수중에 1백만 엔을 소지하였다.
그룹은 철원으로 가는 도중에 경찰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조선인 50명을 모집하였다. 그룹은 경계선을 넘다가 우리 군대에 체포되었고, 평양시로 보내졌으며,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다. 이 그룹과 거의 동일한 시점에 이영과 몇몇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불법적으로 서울에서 평양으로 왔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인쇄된 삐라를 다량 가지고 왔다. 이영의 실질적인 활동에 대해 이영과 나눈 사적인 대담으로부터 자기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하고 부르고 있는 이 그룹이 실제로는 대중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기한 과업들은 현재의 단계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선 내 민주주의 계층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인민대중에게 명료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전체 사업에 해가 되는 정치 과업을 제기하면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향을 지향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로 인해 중앙위원회는 대중들 사이에서 권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공산당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 그룹은 북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자기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분파적 방법을 통해 조선에서 공산당이 조직되는 시기를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들며, 아마도 이러한 목적으로 이영도 평양시를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영에 대한 대담의 상세한 내용은 첨부 1~5를 참조하라.

Ⅱ. 당 내부 투쟁
2개의 공산주의 그룹들 간에는 일련의 사상적, 조직적 문제에 있어 통일성이 없다. 이른바 “경성콤그룹”은 자기가 진정한 조선공산당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영이 이끌고 있는 이른바 중앙위원회와 그의 그룹을 이 그룹이 상위의 개별 인사들에 의해서만 조직되었다는 이유를 들면서 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 이영과 그의 그룹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급전쟁, 요컨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경성콤그룹”은 이 전쟁을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대항한 민주주의 나라들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조선에서의 혁명발전 전망 분야에서 이영 그룹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즉각적인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성콤그룹”은 조선에서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완수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근본적인 차이는 조직 문제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영 그룹은 공산당은 불법적인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성콤그룹”은 공산당의 합법화를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선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 일본제국주의 및 반동정당들과의 투쟁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 공산주의 그룹이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1945년 9월에 수립된 조선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결론 : 현재 조선에는 조직적으로 완성된 단일의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영 그룹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그룹 간의 종파투쟁이 현지 당조직들의 조직적 및 사상적 강화에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선에서 민주주의운동의 발전 및 반동정당들과의 투쟁은 단일의 단합된 조선공산당을 창설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헌영이 이끄는 그룹이 조선의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 그룹의 실제 활동은 노동자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박헌영 그룹은 실무사업에서 일련의 실책과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주로 박헌영을 포함한 지도일꾼들의 허약한 사상적, 이론적 준비, 당사업에 있어서의 불충분한 경험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칼라슈니코프(Калашнико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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