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화폐개혁의 총결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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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북조선 화폐개혁의 총결 보고
· 키워드북한의 화폐개혁, 북조선인민위원회, 엔화, 원화, 북조선중앙은행
· 대표주제어북한의 화폐개혁
· 설명문1947년 12월 북한에서 ‘엔’을 ‘원’으로 교체하는 화폐개혁이 실시되었으며 그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는 내용
· 발신자제25군 사령관 코로트코프와 소련민정국장 직무대리 이그나티예프
· 수신자연해군관구 사령관 비류조프와 정치담당 부사령관 시티코프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대표표제어: Доклад об итогах обмена денежных знаков в Северной Кореи
산출물명: ЦАМО,ф.172,оп.614632,д.46,лл.1-33.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обмен денежных знаков в Северной Кореи
면수: 33
발신일: 1947.12.??.
수신일: 1947.12.24.

번역문


북조선 화폐개혁의 총결 보고

연해군관구 사령관 비류조프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비류조프(1904-1964): 1922년 입대. 1937년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수료 후 1939년 제132보병사단의 지휘를 맡음. 독소전쟁 중에는 주로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의 전선에서 복무하였고, 종전 후 불가리아 주재 소련군부사령관, 연해군관구사령관, 국방차관, 국내방공군사령관, 전략로케트군사령관을 지내고 1963년에 소련군 총참모장이 됨. 1964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
상장 동무 귀하
연해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시티코프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1907-1964): 1929년 공산당 입당. 1931년부터 레닌그라드의 콤소몰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레닌그라드시당 및 주당위원회 제1서기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최측근이 되어 1938-1945년 레닌그라드주(州)당위원회 제2서기를 지냄. 레닌그라드방어전과 관련하여 1944년 소련군 상장에 오름. 1945-1947년 연해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1946-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대표. 1948년 10월부터 1950년 12월까지 북한주재 소련대사. 1950-1951년 소련외무서 원동부 고문을 지낸 후 보브고로드주당위원회 제1서기, 연해주당위원회 제1서기, 헝가리주재 소련대사 등을 역임하고 1964년에 사망.
상장 동무 귀하

북조선 화폐개혁의 총결 보고

1947년 12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중앙은행이 발행한 신 화폐의 유통 및 북조선 영토에서 사용되고 있는 구 화폐의 교환방법에 관한 결정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의거하여 특히 12월 6일에서 12일까지 북조선 내 각처에서 화폐교환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화폐개혁의 진행 과정과 결과, 북한 사회의 여론에 대해서는 RG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Captured Korean Documents, Doc No. SA 2007 I, Box 431, “貨幣改革과 今後의 課業에 對한 報告", 北朝鮮中央銀行, 1948. 1. 15”를 참고.

이에 앞서 대대적인 사전준비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 1만 명의 재정회계 일꾼들이 소양교육을 받았으며 교환소가 약 2천 곳에 설치되었습니다. 정당과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들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각종 선전선동 책자들이 약 30만 6천 부 발행되었으며, 3만 명이 넘는 선전선동원들이 조직되었습니다. 화폐개혁에 대한 선전선동 작업의 요강에 대해서는 RG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Captured Korean Documents, Doc No. SA 2009 I, Box 661, Item #143, “「北朝鮮中央銀行券」發行과 舊貨幣交換에 關한 宣傳要綱", 北朝鮮民主主義民族統一戰線中央委員會를 참고.

준비 작업의 진행과정에서 곧 실시될 화폐개혁의 비밀성이 완벽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인민위원회에서 화폐개혁 업무에 파견 나온 동무들뿐만 아니라 소련민정국 기구에서 나온 동무들도 품행에 나무랄 데 없었으며 끝까지 비밀을 엄수했습니다.
정당과 사회단체 및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들 역시 높은 정치적 경계심과 의식성을 발휘했으며, 예정된 화폐개혁을 누설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켰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화폐개혁의 정상적 실현을 위해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였습니다.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하나의 정강과 하나의 호소를 갖고 단합하여 화폐개혁캠페인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들은 화폐개혁에 관한 인민위원회의 결정을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지지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정치적으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화폐개혁의 결정은 국가의 재정적 토대를 부설하고 나라 경제를 강화하고 단일통화체계를 확립함에 있어, 그리고 또한 시장에서 물가를 안정시키고 임금체계를 조절하고 도시와 농촌 근로대중의 복지를 향상시킴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기 위한 적시의 필요조치로서 평가되었습니다.
화폐개혁에 관한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채택된 후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정된 조치의 성공적 실현을 위한 대대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주력했던 것은 짧은 기간에 전 주민을 자기 영향 하에 포섭할 수 있고, 실행되는 조치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고, 또한 대중을 인민위원회 주위로 결속시킬 수 있는 대규모의 선전원 군단을 조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높은 이념적-정치적 수준에서 정해진 기간에 심각한 과오 없이 실행되었습니다.
정당 및 사회단체들, 그리고 또한 인민위원회의 적극적 활동은 인민들이 화폐개혁의 의미와 지향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주민들의 근로계층은 화폐개혁의 시행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높은 의식성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중심으로 결집한 자신들의 모습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의 결정에서 정부의 근로계층의 물질적 복지 향상을 위한 큰 배려를 보면서 그 결정을 열광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적극성을 발휘한 주체는, 근로인민의 모든 계층들 사이에 가장 권위 있고 가장 인기가 있으며 가장 많은 당원을 가진 정당인 노동당이었습니다. 노동당은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실현됨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동당은 모든 민주세력을 통합하고 이들의 단일한 행동강령을 작성함에 있어 그 주창자가 되었습니다. 해당 조치와 관련하여 선전선동의 모든 자료들을 준비하고 발행한 것도 노동당이었습니다.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자신들의 선전활동에 그 자료들을 널리 활용하였습니다. 노동당은 2만 명이 넘는, 가장 많은 선전원들은 준비하였으며 이들을 대민활동에 널리 동원하였습니다. 노동당의 선전원들은 모든 활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성공적으로 올바르게 실현되도록 부단히 투쟁하였습니다. 노동당의 위원회들은 화폐교환소 업무의 성공적 진행에 매일 조력하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화폐교환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주민들에게 올바르게 설명하였으며, 이 조치의 실현과 생산계획의 완수, 그리고 광산, 공장, 철도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을 솜씨 있게 연결하였습니다.
노동당의 적극적 활동 덕분에 북조선의 모든 민주세력이 하나의 블록으로 통합될 수 있었고, 이들의 행동강령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으며, 대중의 정치적, 생산적 적극성을 높이고 시행되는 조치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주민들에게 납득시킴으로써 화폐개혁의 성공적 실현을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주민의 근로계층들에서의 노동당의 권위와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확대되었습니다.
민주당 역시 [화폐교환]캠페인 과정에서 적극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하고는 당원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결정에 관해 설명하는 데 전력을 다 했습니다. 민주당의 각 위원회는 노동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약 1천 5백 명의 민주당 선전원들은 주민들에게 화폐개혁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큰 공을 들였습니다. 일련의 지방에서, 특히 황해도에서 민주당의 각 위원회는 상인들 사이에서 설명사업과 조직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상업에 적극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당의 상당부분을 구성하는 상인들과 함께하는 선동활동은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상인들 중 일부가 화폐개혁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또 오랜 기간 상업을 되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당의 (평양 서부지구의) 개별 위원회들은 상인들 사이에 설명활동을 조직하는 것 대신에 상인들로부터 큰 금액을 수령하기 시작했으며, 이 돈을 당의 소유자금이라고 둘러대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술수는 적시에 적발되어 폭로되었고 민주당 내에 그런 술수가 널리 확산되지는 않았습니다.
“청우당”의 젊은 친구들은 캠페인 과정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행되는 조치에 대한 지지와 동의를 표명하고서도 “청우당”의 위원회들은 캠페인 초기에 대중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화폐개혁의 주창자임을 여기저기서 과시하려고 하였습니다. “청우당”의 함경남도 도위원회 위원장 김옥빔은 자기 당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강령을 통해 오래 전부터 화폐개혁을 요구해왔습니다. 이제 화폐개혁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선진적 강령은 다른 정당에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리 강령은 김일성 동무의 20개 항보다 비할 수 없이 넓고 깊습니다.”
“청우당”의 책임일꾼들도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교환이 시작되기 전에 비밀을 퍼뜨렸습니다. 당 지도자 김달현은 인민위원회 결정이 공표되기 5일 전에 1백만 엔어치의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자기 대리인을 청진으로 출장 보냈습니다. 대리인은 억류되었고 돈은 압수되었습니다. 1947년 11월 30일 김달현은 철원에서 온 도자기회사 주인 전석봉에게 조만간 화폐개혁이 시행될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이 소식을 철원의 대공업자 박주련에게 전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박주련은 서둘러 청진으로 떠났으며 50만 엔어치의 원료와 50만 엔어치의 상품을 구입하였습니다.
“청우당”의 회령시위원회 부위원장 김안석은 화폐개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에 관해 “청우당”의 당원인 상인들에게 발설하였으며 미리 물건들을 사놓으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청우당”의 일련의 지구위원회와 군위원회들은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공표된 후에 그를 교란하기로 작정하고서 “당사랑”이라는 명목의 기부금모집운동을 공고했으며, 이를 구실로 상인 및 투기꾼들을 당의 자원이라고 참칭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금액을 거두었습니다. 이 모금운동은 적시에 폭로되었고 제때에 저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겉으로는 시행 조치에 찬성하고 그를 지지하는 척하면서 “청우당”의 일부 위원회는, 불법적으로 지폐를 더 많이 확보하여 그것으로 당의 재정적 기반을 더욱 건실하게 만들려고 하는 가운데, 인민위원회의 결정을 노골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초창기에 일련의 당위원회들로 하여금 대중 속에서의 활동을 중단하게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화폐개혁에 대한 비우호적 발언이 “청우당” 당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청우당” 지도부는 이런 사실들에 관해 적시에 경고를 받았으며, 그들은 화폐교환의 과정에서 자기 당원들 및 대중에 대한 소양교육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화폐개혁의 전 과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이 성공적으로 마감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은 노동당의 몫이었습니다. 노동당은 힘든 일을 전부 감당하였으며, 당대열의 결속과 단결을 과시하는 가운데 근로대중들 사이에 자신이 가장 권위 있고 인기 있는 정당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2월 5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화폐개혁에 관한 결정이 북조선의 모든 신문에, 총 1백만 부 이상의 지면에 공포되었으며, 이 결정은 주민대중 대다수에게서 정치의식과 근로의식의 고양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주민들이 화폐개혁의 시행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인민들이 새 화폐를 인정하고 화폐개혁을 지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민들 중 근로계층의 절대다수는 그 조치를 큰 감동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대중적 시위와 집회, 신문잡지에서의 수많은 연설과 발언들을 통해 노동자, 사무원, 농민, 지식인 및 수공업자와 소상인들은 시행되는 조치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승인을 표현하였으며, 조선 근로자들을 보살피는 것에 대해 인민위원회와 소련에 무한한 감사를 표시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에서 노동당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인민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의 일보전진을 목격하였였으며, 인민위원회로 대변되는 인민권력의 힘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근로자들은 시행되는 조치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였으며, 이는 그들의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함경북도 구성군 노동자 배상일은 시위에서 이렇게 발언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민족화폐를 갖고 있습니다. 화폐는 [ ? ]에 관해 증언합니다. 이것이 반동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근로자들은 새 화폐를 발행한 것에 대해 인민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보내며, 기업의 생산계획을 기한 전에 완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평안북도 희천군 남면 노동자 김봉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폐개혁은 우리의 삶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법은 우선 각자가 일해야 한다는 원칙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부흥에 대해 당연한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황해도 선천군 정미공장 노동자 김찬승은 선동원들과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 화폐는 인민의 돈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귀중합니다. 인민 모두는 그 돈을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투기꾼들만이 그 돈을 싫어합니다.”
흥남화학콤비나트의 한 노동자가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화폐가 발행된 지금 우리는 우리가 우리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함경남도 홍원군 사무원 전치영은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생겨야 했을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 화폐가 견실하지 못하고 오염되었으며 그 환율이 계속 떨어졌던 것을 목격했습니다. 화폐개혁의 시행은 우리나라에 견고한 화폐유통을 확립할 것이며 자립적인 재정적 기반을 확립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민위원회의 화폐개혁에 관한 결정을 축하하며 승인합니다.”
황해도 신막군 의사 안의욱은 병원 직원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화폐개혁은 큰 행복입니다. 화폐개혁은 창창한 미래의 전망을 열고 있으며, 우리 인민의 바람에 완전히 부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민이 화폐개혁 조치를 만장일치로 맞이하고 지지하는 이유입니다.”
함경남도 북천군 농민 조봉제는 농민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세기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인민은 드디어 우리의 민족화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민권력, 즉 인민위원회가 그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인민의 복지를 배려한 데 대해 인민위원회와 김일성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평안남도 농민 도찬영은 농민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폐개혁은 인민의 이익을 전적으로 표현합니다. 화폐개혁은 인민의 물질적 상황을 개선합니다. 이제 근로자들은 훨씬 더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인민들은 화폐개혁을 환영하며 지지합니다. 우리는 개혁이 투기꾼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는 데에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청진시 소상인 엄영현은 상인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위원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조선에는 많은 종류의 화폐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질서를 수립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민족화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민위원회의 조치를 환영하며 지지합니다.”
평안북도 사보마을에 사는 60세의 농민 김(金)은 농민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민위원회가 근로인민들에게 보여준 그런 태도와 배려를 평생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토지를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민족화폐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크게 개선할 것입니다.”
신의주시 사무원 김학운은 근무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의 민족화폐를 갖기를 오래 전부터 갈망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내 손에 쥐고서 그것을 사랑과 기쁨으로 내 가슴에 대고 불러봅니다. 이 돈으로 우리는 우리 삶을 건설할 것이며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신의주시 종이공장 책임기사 송동조는 시위현장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화폐개혁은 인민위원회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제 자리에서 더 열심히 일하자는 바람과 지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조치는 반동세력의 거짓 비방에 새로운 타격을 가하면서 인민민주주의의 융기하는 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공포되면서 근로대중은 그것을 큰 폭의 생산증대로 기념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매 교대일마다 생산에서 새로운 승리를 기록하였습니다. 12월 9일 성진전기제련공장은 기한 전에 1947년 생산계획을 완수하였습니다. 흥남화학콤비나트 노동자들은 전전(戰前)의 생산수준을 따라잡고 능가하였습니다. 여러 탄광과 광산의 철도운송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을 10∼20% 증대시켰습니다.
이렇게, 주민들의 근로계층들은 화폐개혁에 관한 인민위원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승인하였고, 그것을 생산의 새로운 승리로 기념하였으며, 새 화폐를 인정하고 화폐개혁을 승인하고 지지하였습니다. 이 날들에 그들은 자신의 결속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헌신, 그 조치에 대한 전폭적 지지, 그리고 인민민주주의의 과업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태세를 과시하였습니다.
대상인들과 기업가들은 시행되는 조치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화폐교환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신문잡지에 공표된 때부터 도처에서 장사를 중단했으며 교환에 끝날 때까지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돈으로 물건을 확보하려고 하면서 교환 마지막 날까지 교환소로 가지 않았으며, 개인시장에서 사전에 조직적으로 가격을 담합하면서 물건 값을 높게 책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유엔이 발행된 새 화폐를 폐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것이다”,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위원단이 떠난 다음에 새 화폐가 발행될 수 있다”, “우리는 새 화폐의 효력을 믿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통일정부의 화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 화폐는 폐지될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조선에서의 자국 군대의 철수의사를 표명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화폐를 수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모든 러시아 군표를 유엔 총회로 넘길 것이며 그 군표를 보상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평양의 투기꾼 최일호는 상인들 사이에서 말했습니다:
“이 화폐개혁은 북조선의 마지막 숨결입니다.”
신의주의 대상(大商) 전인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도 역시 화폐개혁이 있었으나 그로 인해 많은 인민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겁니다.”
함경남도 상인 김삼구는 이런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왜 돈을 바꾸려 합니까? 그것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곧 모든 것이 바뀝니다. 미국인들에 의해 중앙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중앙정부가 이 화폐를 폐지할 겁니다.”
“청우당” 당원이자 부농인 주규수는 말했습니다:
“왜 화폐개혁을 생각해냈을까요? 며칠 안에 유엔 대표들이 도착할 것이며 그들은 조선지도부를 조직할 겁니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 곧 전쟁이 발발할 겁니다. 미국은 이미 공격준비를 완료했으며 동해에 수상비행기들이 집결하여 매일 훈련비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전력은 러시아보다 더 강합니다. 따라서 화폐를 교환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그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함경북도 기주군 상인 현배울은 친지들 사이에서 말했습니다:
“모든 민주적 개혁에 끝이 왔습니다. 시행되는 화폐개혁은 종점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라도 잡습니다.”
결국, 대상인과 기업가와 투기꾼들은 화폐개혁을 아주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이 조치를 파기하기 위한 일부 행보를 감행하였습니다. 인민대중의 굳은 결속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를 두려워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중상과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소문들도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개신교의 반동과 우익세력은 처음부터 상당한 적극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들은 화폐개혁을 거부하자는 호소가 담긴 비라를 뿌렸으며, 화폐개혁에 대해 중상하고 선동적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황해도의 [ ? ] 개신교 목사들은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화폐를 교환하지 마십시오. 3월에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단일화폐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목사들 중 일부는 화폐개혁에 관한 인민위원회 결정이 적힌 플래카드들을 파손하였습니다.
반동분자들은 화폐개혁을 지지하지 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짓입니다. 화폐교환은 군표를 몰수하고 조선에 적게 지불할 목적으로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시행되고 있습니다. 조선에 통일정부가 없는 까닭에 돈은 쓸 데가 없습니다. 새 정부가 수립되면 새 화폐도 있을 것입니다.”
12월 9일 평안남도 용암포군 양봉면에서 반동분자들이 중학교에 대한 방화를 시도하였습니다. 평안남도의 구(舊) 지주 이병걸은 테러를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남쪽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돌아오면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을 시행한 자들을 죽일 겁니다.”
황해도 [ ? ]군에서 군의 민주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던 12명의 테러리스트 그룹이 체포되었습니다. 재령, 신천, 안악군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하며 신자들의 화폐교환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화폐개혁의 시행을 방해하고 인민들 사이에서 인민위원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반동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습니다. 인민위원회 결정의 성공적 완수를 위한 투쟁에서 통일전선에 합류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활동, 그리고 광범한 인민대중의 고도의 정치적 적극성은 반동들의 반대행위를 분쇄하였으며, 반동들은 어디에서도 조직적으로 나서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남조선에서 라디오와 신문잡지 그리고 미군권력도 12월 12일까지 북조선에서의 화폐개혁에 관해 계속 침묵을 지켰으며 어떠한 해설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12월 12일 서울의 라디오는 북조선에서의 화폐개혁 소식에 관한 소식과 더불어 미국 기자의 짧은 논평을 전하였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서울의 신문과 라디오는 북조선의 화폐개혁에 관한 여러 종류의 날조와 비방을 더 많이 쏟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2월 15일 서울의 라디오는 “화폐개혁 및 구 화폐의 신 화폐로의 교환에 관한 법령의 결과 북조선에 무질서상태가 야기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12월 20일 서울의 라디오는 소련 사람들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방송은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1947년 12월 7일자 인민위원회 명령에 따라 북한중앙은행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공정하지 않은 화폐개혁을 시행하였다. 이 개혁은 오직 공산주의자들과 인민위원회 고위관리들에게만 유리하다.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가구당 500엔씩, 그리고 18세 이상의 가족구성원에게는 200엔씩 교환해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와 인민위원회 고위관리에게는 1만 엔씩 바꿔준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은행에 많은 금액을 납입하지만, 그들이 납입한 돈을 2개월 후에 환급받을 지의 여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 소련군 병사들은 5천 엔씩, 장교들은 1만 엔씩 교환하였다. 조선인 상인들은 소련군 장병들과 1:10으로 교환할 수밖에 없다. 소련 사람들은 조선 상품들을 높은 가격에 구입하여 그것을 소련으로 보낸다.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인민위원회 고위관리들은 소련군 장병들과 서로 협잡을 한다. 상인들은 자신의 가게를 닫았지만 압박 아래 그들은 자기 상품들을 매매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 혼자 이런 불공정한 화폐개혁을 고안하였다.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대를 위해 존재한다. 남한은 외국의 간섭 없이 자신의 국가를 수립할 것이다.”
우리가 보유한 자료에 따르면, 북조선에서의 화폐개혁의 결과 남조선에서 시장의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였으며, 사람들은 상품을 모조리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쌀 한 말 7.5kg의 가격이 2천 엔이 넘습니다. 남녘에서 북녘으로 월경하는 많은 사례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월북자들은 남조선에서의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시행된 화폐개혁의 짧은 중간결산

1. 시행된 화폐개혁은 귀하의 다음과 같은 원칙적 훈령에 의거하였습니다:

a) 구 화폐와 신 화폐의 교환비율을 1:1로 한다. 즉, 소련군사령부의 1엔 혹은 조선은행권 1엔은 북조선중앙은행의 1947년 발행권 1원으로 교환이 된다;
b) 주민의 개별 범주나 조직에 따라 구 화폐의 신 화폐로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교환하려는 금액 중에서 정해진 한도를 초과하는 금액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특별결정이 있을 때까지 동결계좌나 예금에 넣어둔다;
c) 소련군과 소련의 단체들이 보유한 구 화폐 현금잔고는 교환하려는 금액 전부가 신 화폐로 교환이 된다;
d) 소련군 장병과 소련 시민의 개인 저축은 전액 교환이 된다;
e) 소련군사령부의 엔화 저축과 조선은행 발행 엔화 중 사용 정지된 부분은 교환이 종료된 후에 폐기된다;
f) 화폐교환은 소련군사령부와 소련중앙은행의 지도 아래 북조선중앙은행이 주관한다;
g) 화폐교환의 목적은 소련군사령부가 발행한 엔을 사용정지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자립재정의 토대를 조성하는 것이다;
h) 화폐개혁 과정에서 위조화폐에 의한 화폐시장 오염 및 남조선으로부터의 화폐 유입 저지를 위한 투쟁 필요성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재정 자립의 토대 구축 필요성에 관한 선동활동을 전개한다;
I) 화폐개혁 시행기간은 1947년 12월 6일에서 12일까지이다. 즉, 8일 안에 북조선 전역에서 화폐교환을 종료한다.
귀하의 위 지시에 의거하여 화폐개혁이 준비되고 실행되었습니다.

2. 준비작업

10월 내내 모든 필요한 조사자료와 계산이 준비되었고, 11월 6월 경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결정 초안과 “북조선중앙은행권 신 화폐의 발행과 북조선에 존재하는 구 화폐의 교환방식에 관한” 북조선중앙은행의 실행 지침이 작성되었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하여 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엄격히 제한되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 대표자들은 1947년 11월 27일까지 기본 문서들의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47년 12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에서 재정국장 리봉수의 보고가 있은 후에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북조선중앙은행권 신 화폐의 발행과 북조선에 존재하는 구 화폐의 교환방식에 관한” 결정이 채택되었습니다.
화폐개혁에 관한 인민위원회의 결정과 북조선중앙은행의 지침은 12월 1일 발간을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은행의 인쇄소로 넘겨졌으며, 12월 3일 아침 인쇄소는 주문을 완수했으며 다음과 같이 발간하였습니다:
a) 결정과 지시 - 5천 부
b) 교환소에서 돈을 받고 교부할 영수증 - 2백만 장
c) 교환소의 출납보고서 - 3만 부
d) 교환소의 일간업무보고서 - 3만 부
12월 1일부터 5일까지 은행과 교환소 일꾼들과의 훈령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에 교환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교환소는 모두 1,690개소가 설치되었으며, 교환소에서 총 9,354명이 일하였습니다.
화폐는 12월 3∼5일에 철도의 특별열차로, 자동차로, 비행기로 각 지방으로 공급되었습니다.
교환이 개시되는 시점에 25억 7159만 8,200원이 교환소에 공급되었습니다.
돈과 문서의 운송을 위하여 특별열차 8대가 이용되었으며, 자동차로 6,948개의 [ ? ]이 운송되었습니다. 이중에 1,500개는 소련군사령부의 자동차들로 운송되었고, 거리가 먼 일부 도(道)에는 비행기 2대가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교환소를 설치하고 교환소에 신 화폐와 문서를 공급하는 모든 준비작업은 12월 6일 아침 경에 완료되었습니다. 12월 6일 아침 7시 교환소들이 문을 열었고, 인민위원회의 결정에 의거하여 구 화폐의 신 화폐로의 교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준비작업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일이 비밀성을 엄수하는 가운데 4∼5일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진행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준비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주적으로, 그리고 특히 성실하게 일하였으며, 게다가 도입된 경계대책들 덕분에 비밀이 엄수되었고, 주민들은 12월 5일까지, 즉 인민위원회 결정이 공표될 때까지 임박한 화폐개혁에 관해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짐작하지도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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